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 성지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1882~1867)
정찬문 안토니오는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먼저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자 교리를 배우고 41세가 되던 해(1863년) 입교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가을 정찬문 안토니오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일가 친척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고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가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관장 앞으로 끌려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옥에서 무수히 매질을 당한 뒤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로,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시신은 사흘 동안 옥에 방치되어 있다가 그의 조카들이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 현재의 진주시 사봉면에 매장하였다.

'머리 없는 무덤'(無頭墓)에 대한 구전과 발굴
정찬문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사촌들이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고복(考覆)*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기에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고 잊혀져 갔다.
*조선 시대 형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수가 자백했더라도 세 번 국청을 열어 거듭 조사하는 삼개(三開) 제도가 있었다.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차사 1명을 보내 수령과 함께 심문한 뒤 다시 2명의 차사를 보내 심리하는 데 이를 '고복(考覆)'이라 한다. 정찬문 안토니오가 체포되었을 때 '고복'을 했다는 기록이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정리번호 163)에 나온다.
그러다 1947년 진주 문산 본당 주임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는 순교자 무두묘(無頭墓)에 대한 구전을 듣고, 사료를 근거로 정찬문 안토니오의 무덤 조사를 시작하였다. 1948년 3월 29일 구전을 토대로 허유고개 비탈길 가에 있는 한 순교자 무덤을 찾게 되었는데, 아무도 무덤인줄 모를 정도로 봉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해 1948년 5월 31일 순교자의 무덤을 개봉하고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모신 뒤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그 뒤 '순교자 정안또니오 성지조성위원회'가 구성되어 1975년 10월 순교자의 유해를 지금의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하였고, 새롭게 단장하 1978년 '정 안또니오 순교비'를 세웠다.

허유고개 길 옆에 복자의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진 표지석

정 안또니오 순교비
* 자료 출처: 마산교구 홈페이지 정찬문 안토니오 묘소 소개글;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마산교구, 2007)
복자가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자리, 진주 진영과 진주 옥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 진영과 관장(진주 목사) 앞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진주 진영이나 진주 옥에서 무수히 매질 순교하였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가 진주 옥에 갇히자 그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알았고 남편이 입교하도록 이끌었던 그의 아내 윤 씨가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넣어주곤 하였다. 어느날 정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심하게 매를 맞게 되었는데, 그날 밤 죽기까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영남순교사>에 따르면, "정안당(안토니오)의 부인 윤씨는 남편 순교 후에 시가 친족들의 구박을 견디다 못하여 아들 중순을 데리고 허유고개를 눈물로 떠났는데 그후 행방은 알 길이 없게 되었고 허유고개 근처에 순교자의 직계 후손은 없고 방계 후손이 살고 있다 한다"고 적혀 있다.
진주 진영에서 옥은 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진주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시장의 어물전 상인들은 이곳에 우물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진주 옥 터임을 알 수 있는 진주 중앙 시장 안 우물 자리
* 관련 순교지: 진주 진영과 옥터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