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소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소

 

 

 

"그 아내가 밥을 빌어다가 옥중의 남편에게 먹이더니,

하루는 무수히 매를 맞고 그 밤에 죽으니

시체가 옥중에 3일 동안 버려져 있었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1882~1866)

 

*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먼저 입교한 아내에게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41세가 되던 해 입교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던 해 가을 포졸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일가 친척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고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유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가 혹독한 형벌을 받기를 반복하던 중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그의 나이 45세였다.

 

 

- 무두묘(無頭墓)에 대한 구전과  발굴 -

                                             

 * 그가 순교한 뒤 사촌 3형제가 진주로 갔는데, 순교자의 머리는 가져오지 못하고 하체만 가져와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후 진주 문산 본당 주임 서정도 베르나르도 신부는 굼실 공소(사봉면 사곡리)  정성갑 바오로 회장의 순교자 무두묘(無頭墓)에 대한 구전을 토대로 1947년부터 순교자 무덤 조사를 시작하였다.

 

1948년 3월 29일 문산본당 서정도 신부는 본당 청년회원들을 데리고 엠마오 행사를 겸해 순교자 묘소 발굴에 나섰다. 순교자의 후손(종 증손)인 정경진의 증언을 토대로 무덤을 파보았으나 무두묘가 아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본당 신부와 여러 교우들이 문산으로 귀가하고, 차편이 없어 몇몇 청년들은 남게 되었다.

 

그때 무촌리 중촌에서 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당시 85세의  광산 김씨 '텃골 마누라'라는 노인(1864년 8월 15일생, 무촌리 1024번지 거주)이 청년들에게 다가와 언짢아 하며 "왜 엉뚱한 무덤을 팠을꼬! 찾는 무덤은 다른 곳에 있는데......"하며, 어릴 때부터 '서학을 하다가 목 잘려 죽은 무덤'이라고 알고 있는 허유고개의 무덤을 알려주었다.

 

교우들(주로 청년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매장을 한 흔적이 완연했다. 이 제보로 1948년 3월 29일 순교자의 무두묘가 확인되었다. 순교자의 묘소는 허유고개 비탈길 가에 있었는데, 아무도 무덤인줄 모를 정도로 봉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보고를 받은 서 신부는 절차와 예를 갖추지 않고 순교자의 무덤을 파헤친 청년들의 성급한 행동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서정도 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본당 수도자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하였다. 그리고 중촌 마을 학생들이 사봉 초등학교로 가는 등교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소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고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진주 옥봉동 본당 주임 정삼규 요한 신부는 옥봉동, 칠암동, 문산, 장재, 사천 본당을 중심으로 '정 안토니오 순교자 현양위원회'(회장 김영도)를 구성하고, 부지 754평을 확보하여 1975년 10월 순교자를 현재의 곳으로 모셨다.

 

  - 자료 출처: 천주교 마산교구 미디어국 발행,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2007 -

 

 

 

 

 

 

 

 

 

 

 

 

 

 

 

 

 

- 허유고개 길 옆에 무덤이 있던 곳 세워진 표지석과 이장된 후 조성된 현재의 묘역 -

 

 

 

순교자들의 신앙 증언지: 진주 감옥과 우물터

 

 

*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되어 진주 감옥으로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정찬문 안토니오가 이곳에서 무수히 매를 맞고 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윤봉문 요셉은 거제에서 통영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진주로 이송되어 갖은 형벌을 받고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함안 미나리골의 구한선 타데오는 옥에 갇혀서도 진주 관장 부인에게 주요 교리를 설명하기도 하였으며, 심한 매질을 당한 후 석방되어 집으로 온지 7일만에 후유증으로 순교했다.

 

* 진주 감옥이 있던 자리에 중앙 공설 시장이 세워졌고, 이곳 어물전의 상인들은 이곳에 우물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 정찬문 안토니오가 잡혀가자 많은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주곤 하였다. 어느날 그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심하게 매를 맞게 되었는데, 그 밤에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순교자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 진주 감옥과 우물터를 방문한 현장조사단 -

 

 

 

 

- <치명일기>의 정찬문 안토니오와 구한선 다테오에 관한 기록 -

 

 

- 정찬문 안토니오의 기록이 담긴 <병인치명사적>  -

 

 

* 김구정의 <영남순교사>에 의하면, "정안당(안토니오)의 부인 윤씨는 남편 순교 후에 시가 친족들의 구박을 견디다 못하여 아들 중순을 데리고 허유고개를 눈물로 떠났는데 그후 행방은 알 길이 없게 되었고 허유고개 근처에 순교자의 직계 후손은 없고 방계 후손이 살고 있다 한다"고 적혀 있다.

 

 

 

 

 

 

 

 

 

 

 

 

 

 

 

 

- 순교자 묘역 앞에 세워진 사봉 공소 -

 

 

 

<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소 순례 안내  >

 

 

주소: 52611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 46 - 6 

*관할 성당:문산성당 전화 (055-761-5453)

 

* 교통편: 대중교통 이용

 

1) 마산 남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봉행 버스 이용 - 사봉 삼거리 하차 - 안내 표지판

 

2) 진주 산업대학교, 남중학교 건너편 정류장(시내버스 17-5, 51, 55번 버스이용) - 사봉 삼거리 하차 - 안내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