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원주 강원 감영과 서지마을

 

 강원 감영

 

순교 복자 김강이 시몬, 최 비르지타, 최해성 요한의 신앙 증거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입니다."

- 최해성 요한 복자 -

 

 강원 감영 전경 (*사진출처: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강원 감영

원주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강원 감영은 옛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강원 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1395년(태조 4년)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년)에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하였다. 

감영의 중심 건물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선화당'(宣和當)은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관찰사가 행정, 농정, 조세, 재판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 선화당을 비롯하여 재은당(내아), 포정루(정문), 4대문, 객사 및 부속건물 등 31동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1634년 원주 목사가 재건되었다.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가 2018년 복원 작업을 통해 총 12동의 목조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일부 설명글 출처: 국가유산청] 

 

  강원 감영 선화당 현재 모습(*사진출처: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포정루와 선화당의 옛 모습(강원도유형문화재 제3호)

강원 감영 포정루와 선화당 옛사진 (*사진출처: 원주시역사박물관 홈페이지)

 


<관동지>(1829-1831)에 실린 강원감영 지도 상의 형옥과 선화당 위치

 

강원 감영에서 순교한 복자 3위

김강이 시몬

복자 김강이 시몬(1765?-1815), 강원 감영 첫 순교자

김강이 시몬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피신해 다녀야만 했다. 박해가 끝난 뒤 등짐 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여러 곳을 전전하다 강원도 울진으로 가서 정착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후 김강이 시몬은 강원 감영(원주)으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이 집행되기 전에 이미 형벌로 인한 상처가 아주 심한데다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로 1815년 12월 5일 옥사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 이상이었다.

 

최해성 요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복자 최해성 요한(1811-1839)

최해성 요한은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으로, 그의 집안은 본디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살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조부가 유배를 가면서 유배지가 있는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고, 이 유배지에서 최해성 요한은 태어나고 자랐다. 복자 최 비르지타가 그의 고모이다. 최해성 요한은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가족과 함께 원주 서지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가족을 피신시킨 뒤 교회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관장에게 먼저 문초를 받고 이후 강원 감사와 영장 앞에서도 극심한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 1839년  9월 6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최 비르지타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복자  최 비르지타(1783-1839)

복자 최 비르지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남편이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준 죄로 유배를 가게 되자, 남편을 따라 유배지로 갔다. 유배지에서 남편이 병사하자 오빠 네로 왔는데, 그녀의 오빠가 최해성 요한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조카 최 요한이 체포되어 강원 감영이 있는 원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조카를 만나고자 감옥을 찾아 갔다가 천주교인이냐는 물음에 의연하게 자신이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었다. 최 비르지타는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옥에서 굶겨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4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옥 안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가 1839년 12월 8일과 9일밤 사이로, 그녀의 나이 56세였다.   

 

서지 마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한 '서지 마을'(현 원주시 부론면 서지길 2)은 복자 최해성 요한이 박해 시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숨어 들어와 작은 교우촌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신심이 두터웠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실천하며, 교우들에게  "천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말하곤 하였다. 이곳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 신부님이 방문했을 때 그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최 요한의 고모 복자 최 비르지타도 남편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이곳 서지마을에 와서 최해성 요한 가족과 함께 살다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2025년 이곳에  두 순교 복자를 기념하여 서지마을 기념 성당과 서지마을 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강원 원주 서지마을 순교자기념관. 원주시 제공

서지마을 순교자기념관 (*사진 출처: 원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