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성지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순교터

죽산 도호부(都護府)*
죽산은 고려 시대 이래 충청, 전라, 경상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는 주요 교통 요지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죽산현이었으나 군사적 중요성을 띠면서 임란 직후 죽산도호부(줄여서 '죽산부')로 승격되었다. 또한 인조 때 여주에 있던 수어후영(守禦後營)을 죽산으로 옮기면서 죽산 도호부사가 수어후영장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되었다.
* 도호부(都護府): 한자 그대로 '도읍'을 지키는 관청, 도읍의 행정과 치안을 맡은 행정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8곳, 충청도 1곳, 경상도 14곳, 전라도 7곳, 함경도 18곳 등 75개 도호부가 있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된 경향이 남아 함경북도 일대는 거의 모든 곳이 도호부였다.
* 토포사(討捕使): 도적(산적, 화적 등)을 수색하고 체포하기 위하여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鎭營將)에게 겸임시킨 관직이다.
병인박해와 죽산 순교자들 :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하느님의 종 8위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토포사와 영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죽산 도호부사는 도적을 수색하고 체포하는 '토포사'의 직위를 이용하여 인근 여주, 이천, 용인, 안성의 포졸들까지 동원하여 다른 지역보다 많은 천주교인들을 체포하였다. 작은 고을이던 죽산에서 무려 22명의 천주교인들이 순교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박순집 증언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의 종 고시수 야고보(1817-1866)의 경우처럼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으나 수원에서 순교한 사례도 발견된다. 천주교인들이 체포된 지역을 살펴보면, 죽산 이외에 양지, 용인, 성남, 음성, 직산 등 죽산 인근 지역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다.
병인박해 때 죽산에서 이루어진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은 1866년에서 186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한 날 한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여러 번 발견되는데, 순교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 부부,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의 경우가 그러하다. 본래 한 가족을 같은 날에 처형하는 것은 조선의 국법상 금지 사항이었으나 병인박해 당시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만큼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 복자와 하느님의 종들을 순교일 순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여기중과 그의 가족
여기중(1806?-1866)이 먼저 죽산 포교에게 체포된 뒤, 그의 아들 여정문도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마찬가지로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고, 여정문의 아내와 15세 된 아들이 자진하여 포교들을 따라가면서 가족 모두 1866년 죽산 관아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고시수 야고보와 며느리 문 막달레나
하느님의 종 문 막달레나(1848-1866)는 병인박해 때인 남편 고의진 요셉(1847?-1866)이 공주에서 먼저 순교한 뒤, 시부모를 따라 산중으로 피신하여 유복자를 낳고 힘들게 살다가, 1866년(양력 1867년 초?) 시아버지 고시수 야고보와 함께 죽산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한달 뒤 죽산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정덕구 야고보
정덕구 야고보(1845-1867)는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26일 용인 점촌 삼배일에서 삼촌 정여삼 바오로 등과 함께 광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가 혼자 가까스로 빠져나와 가족들을 데리고 공주 국실 점촌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1867년 12월 5일 그곳까지 찾아온 죽산 포교들에게 붙잡혀 죽산 관아로 끌려가 그해 1867년 12월 25일 경 죽산 관아 옥에서 2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 부부
조치명 타대오(1839-1868)는 아내 김 우르시치나(1842-1868)와 함께 1868년 7월(음)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죽산 관아로 끌려가 혹독한 형벌 속에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조 타대오의 나이는 29세, 아내 우르시치나의 나이는 26세였다. 한편, 그들에게는 10살 된 아들이 밥을 구걸하여 옥바라지를 했는데, 그 밥을 함께 갇힌 교우들과 나누어 먹었고, 밥이 부족하면 우르시치나는 굶기도 하였다. 어느 날 우르시치나는 아들에게 곧 죽을 것이니 고향으로 돌아가 있으라 당부했고, 실제로 얼마 뒤 부모를 만나고자 죽산 관아를 찾았을 때는 이미 부모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뒤였다.
최제근 안드레아와 방 데레사 부부
하느님의 종 최제근 안드레아(1848-1868)는 병인박해 대 부친 최종여 라자로가 체포된 뒤 고향을 떠나 비신자 집을 전전하며 막일을 하며 근근히 살다가 방 데레사(1849-1868)와 혼인하여 지내다 1868년 4월(음)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죽산 관아에서 모진 형벌을 받으며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아내 방 데레사의 권면에 힘입어 순교 원의를 다지고, 옥에 갇힌 지 3개월 만인 1868년 음력 7월 아내와 함께 죽산 관아 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다.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박경진 프란치스코(1835-1868)와 오 마르가리타(?-1868) 부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절골로 이주하여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2년 가량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8년 박해가 거세지면서 9월 5일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죽산으로 끌려갔다. 혹독한 형벌 속에서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고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함께 순교했다. 박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고, 오 마르가리타는 미상이다.
하느님의 종 유 베드로
유 베드로(1846-1869)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강원도로 이주하였고, 평창으로 이주해 살다가 1869년 8월 그믐 새벽 밀고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죽산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후 유 베드로는 죽산 관아에 도착하고 보름 정도가 지난 뒤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죽산 성지
현재 죽산 성지로 개발된 곳은 당시 신자들의 처형지로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 '잊은 터'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고려 시대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던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친 곳이라하여 '이진 터'라고 불렸는데, 이후 병인박해 당시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고 하여 '잊은 터'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평평한 땅이지만 당시에는 노송이 우거진 숲으로 삼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가에 접해 있었다. 조정은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쳐형하여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고자 하였다.
현재 죽산 성지 중앙에는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 모양으로 순교자 현양탑과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가 좌우 12기씩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죽산으로 끌려와 순교한 이들로 여정문 일가 등 24명만 “치명일기” · “병인치명사적”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등에 그 행적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100여명의 순교자들은 이름조차 알 길이 없다.

무명순교자의 묘(*사진 출처: 수원교구 홈페이지)
죽산 성지 순교자 현양탑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죽산으로 끌려온 신자들은 진영 동헌 앞에서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옥에 수감되어 배교를 강요당하기도 하고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진영 동헌 앞이나 옥 터와 같은 경우도 중요한 성지이지만 옥 터만이 현 죽산 면사무소 위치라는 것이 알려졌을 뿐 진영 동헌 앞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16년 죽산면사무소 입구에 조성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에는 순교 복자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와 동료 순교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의 성상(최영철 바오로 작)과 순교 성지 안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죽산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표지석(죽산면사무소 입구)
죽산 관아 옥터(안성시 죽산면 348번지 죽산면사무소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