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오륜대순교자성지

부산 오륜대 순교자 성지

 

순교 복자 이정식 요한 양재현 마르티노 묘소 

 

오륜대순교자성지 내 '부산 순교자 묘소'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묘소

 

이정식 요한양재현 마르티노

 

복자 이정식 요한

이정식 요한(1795-1868)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았다.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다. 60세 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키고 열심히 신앙을 실천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어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고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정식 요한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동래 포졸들은 마침내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 이관복 베드로는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포졸들에게 나서 자수하였다.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으며 자신이 천주교인을 분명히 밝히고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으나 교우들의 거처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정식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했으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린 이가 없었다.  동래 관장은 사형을 결정하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

양재현 마르티노(1827-1868)는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양 마르티노는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 박해 때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인으로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자 그는 그들을 태연하게 맞이하며 관아로 끌려갔다.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이 있는 통영으로 이송되었다. 통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배교를 거부하여 옥에 수감되었는데, 옥안에서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자 옥졸은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다시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양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졌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후에도, 양 마르티노는 통영의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고,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왔는데, 옥중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양재현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그의 나이는 41세로 1868년 9월이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 관련 순교지: 부산 수영 장대 성지 (링크)

 

 

 

오륜대순교자성지 새 성전 제대와 색유리화

새 성전과 순교자 묘역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