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이정식 요한 (1795-1868)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요한은 이후 가족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이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68년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이 요한 회장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이 요한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조카인 이삼근 베드로는 이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이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이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림으로써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했지만,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요한은 1868년 9월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다. 당시 이정식 요한의 나이는 73세였다.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