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15 이보현 프란치스코
이보현 프란치스코

15.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1773년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조금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뒤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 없었다.

20세가 조금 넘었을 때, 이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진리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혼인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려고 혼인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고자 황 토마스와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 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이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더해갔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이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 프란치스코는 머지않아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이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께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로 하여금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게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이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절 넘게 이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이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 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번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이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이 그를 넘어뜨린 뒤,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죽게 하였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는데도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