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읍성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장사한 해미 관아
복자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 해미 감옥
- 해미 읍성 -
해미는 조선시대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로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1799년부터 1868년까지 내포지방에서 체포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1814년에는 김진후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하였으며, 그외에도 1811~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첨지 베드로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기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유명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병인박해기에 순교한 전국의 순교자수를 감안하여 해미의 병인박해 순교자수를 추정해 본다면 최대 405명에 이른다는 추정도 가능해진다고 한다.
- 해미 동헌 입구-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 1800년 1월 9일, 해미 옥에서 끌려나온 두 사람은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된 인언민은 청주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한 후 고향 관할인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미 수차례의 형벌로 걸을 수조차 없어 청주에서 해미까지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인 마르티노는 해미 옥에서 젊은 이보현을 만나 서로 격려하며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두 사람을 '때려 죽이라'는 관장의 명령으로 옥에서 끌려나와 매질을 당하면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는 그에게 형리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에 내리치니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끔찍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 하느님의 종 인언민 마르티노.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터였던 해미 동헌 -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님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젊은 나이에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보현 프란치스코.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고집스럽고 난폭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던 이보현은 신자가 된 후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신앙도 깊어졌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연산 관장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당한 후 해미로 이송되어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고백하였다. 사형선고문에 서명을 한 이 프란치스코는 다음날 아침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용감하게 신자됨을 살다간 이보현. 며칠 뒤에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이보현과 인언민에 관한 기록 부분 -
"같은 시기에 용감한 두 명의 투사가 우리의 피어린 아날(annales)지에서도 유명한 해미에서 영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생애.
그에게는 그의 승리에 걸맞는 동료가 있었는데, 마르티노라고 하는 인언민이 그 동료이다....."
- Annales de la Progagation de la Foi: 프랑스 리용에서 발간되던 전교회지.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이 이 잡지에 많이 소개되었다.
- 해미 읍성 안의 감옥터와 호야나무-
순교자들이 수감되었던 해미 읍성 안의 옥터는 순교를 기다리던 '신앙 증거터'이자 교수형이나 옥사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순교터'로 설명될 수 있다. 훗날의 기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증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동헌과 옥(옥은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 중앙에는 담을 길이 반이나 넘도록 싸서 돌린 3칸 기와집이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남쪽으로 문 하나가 나있는데, 그곳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30~40명 가량이나 갇혀 있다. 그 담 밖에는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으니...... 그 옆에 '바깥 옥'이 또 있으니 역시 3칸 기와집이다...... 거기서 북으로 산 밑에 10여칸 되는 기와집이 있으니 관아로 '영장이 공사하는 곳'(동헌)이며, 그 우편에는 아래로 큰 기와집이 있으니 그것이 객사요, 그 앞에는 관민의 주택이 많이 늘어 있었다."
담 밖에 서 있는 큰 고목나무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옭아매어 죽였다고 한다.
- 복자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 해미 감옥 -
해미 감옥에서 옥사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순교자
124위 하느님의 종 가운데 해미에서 옥사한 김진후 비오는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이다. 네 아들 중 맏아들 종현이 이존창에게 교리를 전해듣고 형제들에게 이를 전할 당시 김진후는 50세 가량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이 입교를 권유해도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됨에 기쁨을 누릴만큼 천주교 신앙에 관심이 없었다.
자식들의 열심한 기도는 부친이 은총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는 기쁨으로 바꾸어놓았다. 1791년 이후 네 다섯 차례 체포와 풀려나기를 반복한 그는 1805년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된 후 10년 세월을 해미 옥에서 지내다 숨졌다.
"그가 숨을 거둔 이유가 병 때문이었는지, 굶주림 때문이었는지, 혹은 매질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신앙 고백자의 죽음과 연관되어 그가 견디어냈던 기나긴 박해들 때문에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으며 그의 후손들 중에 여러 명의 순교자가 나왔으니 1846년에 순교한 조선의 첫 사제도 그중 한 명이다."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 김진후 비오에 관한 부분 -
- 해미 읍성 내의 순교기념비 -
<해미 읍성 순례 안내>
* 연락처: (041)688-3183
* 미사 시간: 매일 오전 11시
* 고해성사: 미사 시간 전
* 특별 신심 행사: 제등 행렬 십자가의 길: 매월 둘째 금요일 저녁, 해미 읍성~여숫골(약1.5Km)
* 기타 사항: 해미 순교 성지에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