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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포천 동헌과 형방 터-홍교만, 홍인19.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한양 출신으로, 훗날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며, 그도 높은 벼슬을 지낸 맏형과 함께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되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인 레오는 그의 아들이며, 같은 해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는 그의 사위이다.
포천으로 이주해 사는 동안,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신앙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한 아들 홍인에게서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실천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주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런 다음 비신자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다. 또 글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냉담자를 회두시키거나 교리를 알고자 찾아오는 이들을 권면하는 데 열중하였다. 포천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열성 때문이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사돈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를 자신의 집에 숨겨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신자가 이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이내 그의 이름도 박해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오래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왔고, 오래지 아니하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2월 14일,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곧장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박해자들 앞에서 끊임없이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오히려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랄 정도였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가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끊임없이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