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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소문밖 순교지-하느님의 종 25위20. 최필공 토마스 (1744-1801)
1744년 한양의 의원 집안에서 태어난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1790년에 사촌 동생인 최필제 베드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그의 조상들 중에는 조정에서 의관으로 봉직한 이들도 있었지만, 토마스는 관직도 없는 데다가 가난하여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품만은 솔직하고 너그러웠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최 토마스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였다. 그는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으며, 이로 말미암아 박해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토마스는 몇몇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체포된 동료들은 대부분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 그는 교리를 설명하면서 목석처럼 신앙을 고수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은 이 사실을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임금은 ‘어떻게 해서든 그가 천주교 신앙을 버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박해자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최 토마스를 배교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비신자인 그의 숙부와 동생들이 옥으로 찾아와 울면서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이때 사촌 동생인 최필제 베드로는 거짓으로 최 토마스의 자백서를 써서 박해자들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 정조 임금은 관리들에게 명하여 ‘최필공을 옥에 가두되, 특별히 보살펴 주도록 하라.’고까지 하였다. 결국 그는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석방된 뒤 최 토마스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조정에 올리는 약재를 검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또 임금의 도움으로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 토마스의 마음에는 여전히 천주 신앙에 대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3년 뒤, 그는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는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는, 1794년 말 주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받고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다.
최 토마스는 1799년 8월에 다시 체포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1791년에 마음이 약해졌던 사실을 뉘우치면서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고백하였다. 정조 임금은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되돌려 보려고 하였지만,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용감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관리들이 토마스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임금은 이를 거부하고 그를 석방해 주도록 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인 음력 12월 17일, 형조에서는 최 토마스를 다시 체포하였다. 이틀 뒤에는 사촌 동생인 최필제도 체포하여 같은 옥에 가두었다.
최 토마스는 이후, 이전의 행실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한 믿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단언하였다.
얼마 안 있어 최 토마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은 데다가 형벌과 옥고로 인해 사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를 때에는 거의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장에 이르자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칼날이 그의 목을 비켜 가면서 피가 손으로 흐르자, 최필공 토마스는 이것을 보면서 “보배로운 피!”라고 외쳤다. 그때가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