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24 원경도 요한
원경도 요한

24. 원경도 요한 (1774?-1801)

 

'사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되던 1797년에 사촌 이중배 마르티노와 함께 김건순 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원 요한은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00년의 주님 부활 대축일에 원 요한은 이 마르티노와 함께 동료의 집으로 가서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면서 하루를 보내다가 체포되었다. 원 요한과 동료들이 여주 관아로 끌려가는 도중에 일행은 원 요한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노모가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게 해 달라고 포졸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아에 도착하자마자 여주 관장은 그들 일행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고,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때 원 요한은 일행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주교에서는 다른 사람을 밀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천주를 배반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도 그들은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옥중에는 뒤에 체포된 원 요한의 장인인 최 마르첼리노도 함께 있었다.

그동안 원 요한은 여러 차례의 형벌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낫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늙은 여종이 옥으로 달려와 노모와 부인이 슬퍼하는 사정을 전하면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촌인 이 마르티노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1800년 10월에 원 요한과 동료들은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감사는 마침내 그들로부터 최후 진술을 받고 사형을 선고한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감사가 내린 요한의 사형 선고문에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 교회의 지시대로 형에게 제사를 폐지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를 모두 끊어 버린 행위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그들 모두를 고향으로 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원경도 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 또는 28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