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여주 성당

여주 성당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던 초기부터 신앙의 여정이 함께 시작된 여주

 

여주 순교자 현양비

 

여주 지역 천주교 신앙 공동체

경기도 여주에는 초기 천주교 수용의 요람인 주어사가 있고,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집이 있는 양근과 이웃해 있었기에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해졌다. 권철신의 제자였던 윤유일 바오로가 입교한 뒤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전교하면서 여주 지역에도 천주교가 전파되었다. 또한 여주에 살던 김건순 요사팟이 입교하여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등에게 전교함으로써 여주 지역에 천주교가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여주 출신의 순교 복자들과  하느님의 종들

천주교가 여주에 널리 퍼지면서 여주 지역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다. 여주 출신의 대표적인 순교자들로, 1795년에 순교한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를 비롯하여, 1801년 신유박해 순교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 이중배 마르티노(1751?-1801),  원경도 요한(1774-1801), 윤유일의 동생 윤유보 야고보(?-1801), 이희영 루카의 조카 이현 안토니오(?-1801),  정광수 바르나바(?-1802), 그의 여동생 정순매 바르바라(1777-1801), 그리고 하느님의 종 정종호(1751?-1801)와 임희영(?-1801) 등이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정종호는 양근 출신의 조용삼 베드로와 함께 1800년 4월 15일, 주님 부활 대축일 정종호의 집에 모였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그날 종일 길가(현 양섬지구 공원)에 나와 잔치를 벌이고 다 함께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큰소리로 성가를 합창하였다. 당시 천주교인들을 뿌리 뽑겠다고 벼르고 있던 여주 관장은 이들의 모임을 알게 되자 곧바로 포졸들을 보내어 이들을 체포하였고, 조용삼 베드로 가족이 살던 집의 주인 임희영도 함께 체포하였다.

이  6명의 교우들은 함께 여주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1800년 10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았다. 이듬해 1801년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면서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했다. 그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던 조용삼도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고, 1801년 3월 27일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했다. 감옥에 남아 있던 5명 교우들, 곧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정종호와 임희영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 지방민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라'(해읍정법)는 판결에 따라 모두 같은날인 1801년 4월 25일 여주 관아에서 남쪽으로 1리 떨어진 대로변(현재 비각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여주 출신의 다른 순교 복자들 가운데 정순매 바르바라는 올케 윤운혜 루치아에게 교리를 배워 동정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올리고 '허가 처' 라고 속이고 한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 정순매 바르바라는 혹독한 형벌을 받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여주로 이송되어 1801년 7월 3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4세였다. 한편, 정순매의 오빠 정광수 바르나바는 윤운혜 루치아의 남편으로, 윤운혜가 체포된 후 한양과 지방을 오가면서 피신하다가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형벌을 받았으나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사형판결을 받아 고향 여주로 이송되어 1802년 1월 39일 마찬가지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여주 관아 남문 밖 형장 순교터(여주시 여흥로 비각거리)에 세워진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

 

여주 참수 순교터(비각거리) 안내판

 

여주 관아 옥 터 (여주시 여흥로 109번길 15)

 

여주 순교자 기념비(양섬공원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