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최봉한 프란치스코 (1785-1815)
‘여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다래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진강’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5~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서석봉 안드레아와 구성열 바르바라 부부는 그의 장인과 장모였다.
최 프란치스코는,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해 살던 중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과 누이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의 부친은 이 무렵에 사망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간 최 프란치스코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 살면서 황사영 알렉시오, 최필공 토마스 등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가운데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누이를 정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그대로 살게 하고, 자신은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 그는 동정을 지키며 살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친척들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서석봉 안드레아의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최 프란치스코는 가족들을 데리고 장인 부부와 함께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리)을 찾아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의 주님 부활 대축일, 밀고자를 앞세우고 노래산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 체포될 당시에 그는, 동료들에게 ‘문초를 당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뒤집어 씌우라.’고 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하였다.
경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최 프란치스코는 장모인 구 바르바라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끊임없이 그녀를 권면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형벌 가운데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대구로 이송된 후 프란치스코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정신을 잃기도 하였으나, 그의 열심과 용기만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가 갓 넘었었다. 또 그가 순교한 시기는 1815년 음력 5월경이었다.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순교하기 전에 대구 감사가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최봉한은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다. 그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들을 수습해 가지고 경상도 산골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신자들과 함께 한마을을 이루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며 살았으니, 지극히 엄한 법률로 다스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