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03 서응권 요한

103. 서응권 요한 (1827∼1866?)

 

서응권(徐應權) 요한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字)는 ‘선겸’(善兼)이며, ‘응권’은 그의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는 대대로 경상도 김해군 상북면 장방리의 노루목(현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대항)에 살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한 뒤 파평(坡平) 윤씨(尹氏) 안나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 여섯을 두게 되었다.

요한과 안나 부부는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언제부터인가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섯 자녀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던 중 요한 부부는 장남 서석원(徐錫元, 베네딕토)이 장성하여 혼인하면서 1865년에 손자를 보는 기쁨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한 가족의 기쁨과 평온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1866년의 병인박해로 깨지고 말았다. 이내 박해의 위협은 경상도 남부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고, 어느 날 김해 노루목 마을에도 포교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서응권 요한은 포교들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는 아내 안나와 함께 마을 인근에 있는 초분(草墳) 안으로 피신하였다. 포교들이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자신들을 체포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다른 자녀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사흘 뒤, 서응권 요한은 포교들이 물러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아내 안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는 뜻하지 않은 참극이 벌어져 있었다. 그들 부부 대신 어린 자녀 세 명이 포교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것이었다. 여섯 자녀들 가운데 장남 베네딕토와 차남 석형(錫亨), 삼남 석수(錫首, 비오)는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위험을 느끼고 피신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나머지 어린 자식 세 명은 집에 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정신을 차린 요한과 안나 부부는 김해 관아로 찾아가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대신 이 어린 것들이 모두 죽고 말았는데 이곳에서 어찌 농사를 짓고 살아가겠으며, 또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리오? 관가에 자수하여 신앙을 증거함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한과 안나 부부가 김해 관아에 자수하자, 관장은 그들에게 ‘천주교 신자냐?’고 묻고는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이를 거부하였고, 그때부터 형관들은 그들 부부에게 갖가지 형벌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천주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다가 다른 교우들과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요한의 나이는 39세 이상이었다.

순교 후 관아에서는 요한 부부의 시신을 내다가 제멋대로 매장해 버리고 말았으나, 다행히 2개월 뒤에는 가족들에 의해 따로따로 수습되어 각각 다른 장소에 안장될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삼남 서석수(비오)에 의해 지금의 장소(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106번지)로 함께 이장되어 쌍분이 조성되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