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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양111. 윤자호 바오로 (1809∼1868)
윤자호(尹滋鎬) 바오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1920년에 사제품을 받은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는 그의 손자이고, 1930년에 사제품을 받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그의 증손자이다.
윤자호 바오로는 충청도 논산의 노성(魯城)에서 삼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논산의 강경(江景)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 두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친을 모시고 충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 교우로부터 천주 교리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후 바오로는 다시 부친을 모시고 고향 노성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였다. 그러나 이단에 빠져있는 비신자 친척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다시 부친을 모시고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있는 한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들 부자는 천주를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지만, 생활이 곤궁해지면서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향 노성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다시 비신자인 친척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는 교우인 밀양 박씨와 정혼한 뒤, 몰래 고향을 떠나 광천 독바위(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의 한 객줏집으로 가서 머슴을 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유혹은 여전하였고, 이에 바오로는 그 집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장사보다는 죄에 빠져 있는 영혼들을 구하고 교리를 전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또 교우촌을 방문할 때마다 강론과 훈계를 통해 교우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었으며, 그 결과 그의 이름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오로는 공주 유구의 관불(冠佛) 교우촌(현 충남 공주군 유구면 녹천리)에 사는 교우들이 인근에 사는 비신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관불로 이주해 살면서 교우들을 도왔고, 얼마 안 되어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강론했으며, 불목하는 교우들의 화해를 위해 힘쓰고, 쉬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회두하도록 권면하였다. 또 교회를 위해 교우들로부터 애긍전(哀矜錢)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결과 바오로 회장의 행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강론을 듣기 위해 각처에서 찾아오는 교우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한 번은 바오로 회장이 애긍전을 모아 오다가 천안 소반이 고개(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에서 도적들을 만나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려 할 즈음에 포졸들이 나타나 그 도적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바오로 회장은 포졸들에게 “이들은 지금 나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것인데, 나도 처지가 급해 당장에 돈을 갚을 수는 없기에 가을에 주겠다고 하여 옥신각신하는 중이다.”라고 거짓으로 둘러대 도적들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바오로 회장은 충청도 대흥을 거쳐 경기도 용인 더우골(현 용인군 이동면 서리의 덕골)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유구의 관불 교우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의남매인 김 마리아와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때는 체포되지 않았다.
윤자호 바오로 회장이 체포된 것은 1868년의 무진박해 때였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수원 포교와 포졸들이 교우촌으로 들이닥치자, 바오로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의관을 차려입은 뒤 그들을 따라나섰다. 이때 그의 아들과 마을 교우들이 포졸들을 물리치려 하자 바오로 회장은 “천주의 안배하심을 어찌 사람이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를 만류하였다.
바오로 회장이 수원 관아로 압송되어 오자, 관장은 “너는 누구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다블뤼 주교에게 배우고 영세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이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그는 누구의 이름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바오로 회장은 자주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을 끊임없이 권면하여 신심을 다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의남매 김 마리아가 전해주는 밥을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녀가 사다 준 삿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9월 4일(음력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