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26 원 프란치스코

관련 장소

수원, 남양

126. 원 프란치스코 (?~1871)

 

원(元)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원 바오로와 루치아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이전에 모친을 여의고 14세 이전에는 부친마저 여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의 조부는 1793년 홍주에서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이고,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원시보 야고보는 베드로의 사촌 형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량한 데다가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정성이 지극하여 모두가 칭찬하였다. 그는 모친이 죽자 어린 나이였음에도 모친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맹인이었던 부친 바오로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서적을 두루 읽고 익혀서 교리에 아주 밝게 되었고, 자신이 익힌 교리를 교우들에게 가르쳐 주고 대축일이나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인도하였으니, 이를 본 인근 교우들이 모두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신심이 깊은 교우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하면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21세 때에 이르러 교우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프란치스코는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고신극기와 덕행을 쌓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고, 자녀들이 올바로 자랄 수 있도록 가르쳤으며,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순교 신심을 함양할 수 있도록 열심히 권면하였다. 또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는 은총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프란치스코는 더욱 열심히 기도와 묵상, 고신극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그 해 3월 12일(음력 1월 26일)에 포교들이 그의 마을로 들이닥쳐 프란치스코와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포교들이 그에게 “천주교를 욕하고 배반하라.”고 다그치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천주는 나의 큰 부모요 모든 이들의 큰 부모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임금의 왕이요 주님이시니,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이후 포교들은 프란치스코를 죽산 관아로 압송하였고, 그는 다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너희들이 나를 천만 번 죽일지라도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자 포교들은 “네놈은 가서 천주학이나 하라.”고 하면서 방송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재산을 모두 빼앗긴 탓에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순교할 날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871년 봄에 다시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양성 소새 주막(현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신계리)으로 끌려가 갖가지 형벌을 받은 뒤 수원 관아로 압송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수원 관아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또 옥중에서 만난 밀고자를 사랑으로 대하였고, 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도 그를 원수로 삼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자식들이 옥에 넣어준 음식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말과 행동은 냉담하던 두 명의 교우에게 감화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용기를 갖도록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정신을 잃고 다시 하옥되었으며, 이튿날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71년 5월 14일(음력 3월 25일)이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