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27 유문보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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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127. 유문보 바오로 (1813?~1872)

 

‘작객’이라고도 불렀던 유(柳)문보 바오로는, 본래 전라도 나주 사람으로 옥구·장성 등지로 이주해 살다가 장성 내인동(현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서 천주 신앙을 접하고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 영광과 충청도 남포 등지로 다시 이주해 살았으며, 마침내는 장성 삭별리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1871년의 신미박해가 진행 중이던 11월(음력)에 바오로는 장성 삭별리에서 한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곳 진영의 옥에서 유치성 안드레아 회장과 강영원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포교들은 유 바오로의 교회 서적을 압수했는데, 문초 때에 영장이 “저 책이 너의 책이냐?”고 묻자, 그는 “예, 저의 책입니다.”라고 분명히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영장이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했지만, 그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고 “국법대로 사형을 내려주옵소서.”라고만 대답하였다. 이때의 형벌로 인해 그는 팔이 부러지기까지 하였다.

어느 날 유문보 바오로와 유치성 안드레아, 강영원 바오로는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영장이 “진실로 천주 신앙을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함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다시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장은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때 유 바오로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처럼 형벌을 당한 뒤 유 바오로와 두 동료들은 다시 옥에 갇혔다. 그들은 혹독한 옥중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또 오랜 옥중 생활로 기한이 심하여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유감(誘感[유혹])을 입은 탓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던 중 유 바오로는 혹독한 고초로 병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교우들이 그의 임종을 도와 권면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부르다가 옥에서 선종하였으니, 때는 1872년 3월 20일(음력 2월 12일)과 4월 16일(음력 3월 9일) 사이로, 당시 그의 나이는 거의 60세가 되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