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28 유치성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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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128. 유치성 안드레아 (1825~1872)

 

유(柳)치성 안드레아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두 살 때에 일어난 1827년의 정해박해로 부모가 체포되어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그도 충청도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그는 충청도를 떠나 전라도 무장의 암티점(현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무장에 살면서 안드레아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며,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871년에 일어난 신미박해로 다음해 1월 2일(음력 1871년 11월 22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포교가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절대로 배교할 수 없고,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내 나주로 끌려간 안드레아는 그곳 진영의 옥에 갇혔고, 이곳에서 유문보 바오로와 강영원 바오로, 그리고 다른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모두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안드레아와 유 바오로, 강 바오로는 서로를 권면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치성 안드레아와 유 바오로, 강 바오로는 영장 앞으로 끌려가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영장이 “진실로 천주 신앙을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함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다시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장은 “너희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때 안드레아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안드레아와 두 동료들은 혹독한 옥중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또 오랜 옥중 생활로 기한이 심하여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유감(誘感)[유혹]을 입은 탓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던 중 유문보 바오로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병으로 옥사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유치성 안드레아는 강 바오로와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유 안드레와와 강 바오로가 끌려오자 영장은 그들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들은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해졌음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영장은 그들에게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고, 안드레아는 이 형벌 가운데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때는 1872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