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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129. 강영원 바오로 (1822~1872)
자(字)가 ‘영운’(永云)인 강영원(姜永源)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홍산 태생으로, 부모 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다가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전라도 용담(현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으로 이주하여 임군명 니콜라오의 집에서 품을 팔며 살았다.
바오로는 젊어서 상처하였으나 재혼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20여 년을 살았으며,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기도할 때면 항상 겸손과 극기의 자세로 남보다 더 열심히 하였고,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1871년의 신미박해가 계속되던 1872년 1월 3일(음력 1871년 11월 23일), 바오로는 여느 때와 같이 교우들과 함께 니콜라오의 집에 모여 기도를 하던 중 포교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교예규』 등 천주교 서적들을 챙겨 피신할 준비를 하다가 니콜라오와 함께 체포되었다. 본래 포교들이 몰려온 목적은 니콜라오를 체포하는 데 있었는데, 바오로도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함께 체포한 것이었다.
나주로 압송될 때, 강영원 바오로는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이를 본 한 포졸이 버선을 벗어 바오로에게 주자, 한 포악한 포교가 버선을 칼로 찢으려 하다가 그의 발바닥을 베고 말았다.
이윽고 나주 진영의 옥에 갇힌 바오로는 그곳에서 유치성 안드레아 회장과 유문보 바오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모두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강영원 바오로는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영장이 “천주교를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이고, 책은 어디에서 났으며, 동료 교우들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하자, 바오로는 “천주교는 부모에게서 배웠는데 모두 사망했으며, 책은 집안에서 내려오던 것이고, 가르친 사람이나 아는 동료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외우면서 “사람으로서 어찌 이러한 도리를 받들어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옷이 벗겨진 채로 앞뒤 가슴을 맞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옥에 갇혀 있을 때면, 바오로와 동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또 오랜 옥중 생활로 기한이 심하여 세상 복락을 생각하게 되자,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유감(誘感)[유혹]을 입은 탓이니, 이 유감을 물리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자.”고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던 중 유 바오로가 병이 들자, 강 바오로는 밤낮으로 그를 돌보아 임종을 잘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강 바오로는 유 안드레아와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영장은 그들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들은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해졌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영장은 그들에게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고, 바오로는 이 형벌 가운데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때는 1872년 4월 16일(음력 3월 9일)로,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