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장소
양근, 여주, 단내, 죽산
조상덕(趙尙德) 토마스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아들로, 1762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성격과 효성으로 뛰어났던 토마스는 천주교에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덕행과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00년 말 부친 유스티노가 체포되었을 때, 토마스는 부친을 따라가 양근 옥에서 10리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매일 두 번씩 읍내에 들어가 부친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힘을 다하여 그를 위로해 드렸다. 또 부친이 서울로 이송되자, 토마스도 그의 뒤를 따라가 낮이고 밤이고 떠나지 않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부친이 유배형의 판결을 받고 무산으로 유배되자, 토마스는 그곳까지 따라갔다. 그들 부자가 무산에 도착하자마자, 부친 유스티노는 형벌로 인한 상처와 먼 여행의 피로로 쇠약해져 중병이 들고 말았다. 이때 토마스는 늘 부친의 곁을 지키면서 아주 정성스럽게 그를 섬겼고, 이를 본 그곳의 비신자들까지도 감탄하여 ‘그런 효성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단언할 정도였다. 이러한 토마스의 정성 덕택에 부친의 병은 완쾌되었고, 토마스는 부친과 서로 위로하면서 유배지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양근 군수는 유스티노와 토마스 부자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었다. 이에 그는 유스티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지 못한 데에 화가 났고, ‘아비가 자신의 손을 빠져나갔으니 아들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한 끝에 자신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무산까지 포졸들을 보내었다.
양근 포졸들이 무산에 도착한 것은 1801년 8월(음력)이었다. 이에 놀란 유스티노는 아들 토마스에게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냐?” 하고 물었다. 토마스는 늙으신 아버지를 혼자 버려둘 수밖에 없으므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천주의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너무 괴로운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깊은 근심을 나타내 보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것 이외는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유스티노는 “좋다. 이제는 네가 떠나는 것을 안심하고 후회 없이 보내겠다.”고 말했으며, 그들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을 하였다.
조 토마스가 양근 관아에 도착하자, 군수는 이렇게 물었다. “네 아비의 죄를 아느냐?” 토마스는 대답하였다. “관장께서 어떻게 인륜을 무시하고 그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제 아버지가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가 당하시는 처지는 제 잘못으로 인한 것이지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군수는 몹시 화가 나서 토마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참아 받으면서 신앙을 지켰다. 거의 두 달 동안 그는 거의 날마다 관아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한시도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미 체포되기 여러 해 전부터 순교 준비를 하면서 형벌을 받는 데 익숙해지기 위하여 혼자 있을 때면 종종 자기의 팔다리를 몹시 쳤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결국 반복된 형벌을 견디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옥중에서 순교에 이르고 말았으니, 때는 1801년 10월 초(음력)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