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25 안치룡
  1. 안치룡 (1766? ∼1816?)

 

충청도 보은(報恩) 출신인 안치룡(安致龍)은 교우들 사이에서 ‘안 첨지’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윤필영(尹必永)이란 신자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청송 노래산(老萊山, 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815년의 부활 대축일에 밀고자를 앞세운 박해자들이 노래산 교우촌을 습격했을 때, 안치룡은 최봉한(프란치스코), 서석봉(안드레아), 구성열(바르바라), 고성대(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대구 감영에서도 문초와 형벌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안치룡은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이에 경상 감사는 조정에 보고하길 “안치룡은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귀로 듣고 입으로 외워 천주 교리를 깊이 믿었으며,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죽기를 맹세하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처벌을 요청하였다.

경상 감사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끝까지 배교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형을 선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안치룡은 동료들과 함께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고,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정에서 안치룡과 동료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1815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이었다. 이어 조정에서는 12월 26일(음력 11월 26일) 대구 감영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재판 서류 조사를 명하였고, 이후 안치룡은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약 50세였다. 이에 앞서 경상 감사가 조정에 올린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천주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치지 않겠다고 진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