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80 정은 바오로

80. 정은 바오로 (1804~1867)

 

경기도 이천 단내(현 이천군 호법면 단천리)에 살던 정은(鄭溵) 바오로는 우연히 병을 치료해 주러 오던 양지 사람 조 씨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가족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친척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양지 은이(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머물며 비밀리에 성사를 집전하러 다닐 때,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가 대략 1845년 말이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친척들은 바오로의 집을 찾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교회 서적을 불사르고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였다.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서였다. 그럼에도 바오로는 책을 불사르지도 않고, 신앙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2월 19일(음력 11월 13일)에는 마침내 광주 포졸들이 바오로의 소식을 듣고는 단내 마을로 들이닥쳤다. 이때 포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 정일동(鄭一東) 프란치스코와 정수동(鄭秀東) 필립보는 울면서 부친에게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족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다리 힘도 부족하고, 신을 신발도 없다. 또 피한다고해서 무엇 하겠느냐?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말은 들은 바오로의 아들과 손자들이 바삐 짚신을 삼기 시작하였지만, 포졸들은 이미 집 앞에까지 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바오로는 “포졸들이 왔으니 따라가야 하겠다.”고 하면서 순순히 집을 나섰다.

이때 바오로의 재종손자인 정 베드로는 포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순교할 원의를 가지고 바오로를 따라가려고 하였다. 아내가 그의 옷을 붙들고 간절히 만류하였지만, 베드로는 이를 떨쳐버리면서 “재종조부께서 체포되셨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포졸들 앞으로 나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는 이내 광주 관장 앞으로 압송되었다. 그러자 관장은 그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뒤, “다른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바오로와 베드로는 한결같이 “아는 신자가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함께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바오로와 베드로는 함께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67년 1월 13일(음력 1866년 12월 8일) 광주 남한산성의 형장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63세였다. 순교 당시 그들이 받은 형벌은 얼굴에 물을 뿜고 한지를 그 위에 붙여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다 단내의 오방리 뒷산에 안장하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