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90 박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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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90. 박 안드레아 (1818~1867)

 

박(朴) 안드레아는 간양골(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회장으로, 박 루치아와 결혼하여 1859년에 아들 박의래(朴義來) 베드로를 두었다. 1950년의 한국전쟁 때 매산 공소(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의 부회장으로 있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된 박영옥 안드레아는 박 회장의 증손자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안드레아 회장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원머리 교우촌(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의 양(梁) 도미니코 회장이 홍주 진영에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도미니코 회장은 원머리 교우들과 친척들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관아를 찾아갔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안드레아 회장은 이러한 소식을 듣자마자 같은 마을에 사는 유(劉) 서방과 김동(金童)과 함께 원머리로 양 도미니코 회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도미니코 회장에게 “나와 함께 순교하여 죄를 씻도록 합시다.”라고 권면하여 그가 순교 원의를 다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과 함께 간양골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예산 공서티 나루(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의 무한천 나루)에 다다랐을 때 홍주 포교들을 만났으나, 다행히 포교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무사히 간양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드레아 회장과 세 명의 동료들은 간양골에 도착한 뒤 함께 영혼을 구하는 일을 논하고 순교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공서티 나루에서 만났던 포교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그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포교들은 네 명 모두를 오라로 묶고 머리에는 고깔 모양의 몽두(蒙頭)를 씌워 홍주로 압송하였으니, 때는 1867년 3월 18일(음력 2월 13일)이었다.

홍주 진영으로 압송된 박 안드레아 회장은 여러 차례 홍주 영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옥중에서는 교우들에게 순교의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또 함께 체포된 유 서방이 잠시 마음이 약해지는 표를 보이자 힘써 권면하여 순교 원의를 다지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양 도미니코 회장, 유 서방, 김동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7년 10월(음력)로, 안드레아 회장의 나이는 49세였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