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97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

97.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 (1801~1868)

 

김윤심(金允深) 베드로 알칸타라의 본관은 경주,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문집’(文集)으로, 1841년에 서울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의 아우이다. ‘윤심’은 베드로 알칸타라의 자이며, 집안에서는 ‘성문’(星文)이라고도 불렸다.

1801년 경기도 광주의 구산(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서 김영춘(金永春) 바오로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난 베드로 알칸타라는 장성한 뒤 엄 체칠리아와 혼인하여 아들 경희(敬熙)와 딸 막달레나를 얻었다.

베드로 알칸타라가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한 것은 1830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제들에게 교리를 전하였고, 이웃과 친척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여 구산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초기에 구산의 김씨 형제들은 박해자들에게 고발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서울 포교들이 다시 구산으로 들이닥쳤고, 이때 베드로 알칸타라는 형 김덕심(金德深) 아우구스티노와 사촌 한 명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잠시 피신할 수 있었던 베드로 알칸타라의 맏형 안토니오도 그 후에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는 형 아우구스티노와 사촌과 함께 판관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다음 남한산성 옥에 투옥되어 1858년 10월 18일 국왕의 특사로 석방될 때까지 19년 5개월 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다.

석방된 뒤 베드로 알칸타라는 구산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에 친척들과 함께 다시 체포되어 광주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그 해 3월 8일(음력 2월 15일) 6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손자가 거두어 고향인 구산에 안장하였다.

 

* 굵은색 표시: 약전 출간(2018년) 이후 수정된 내용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