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강만수 요셉 신부(1924-1950)
강만수(姜晩秀) 요셉 신부는 1924년 2월 18일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서 강두영과 김동순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신학교인 서울 동성 신학교를 졸업한 뒤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일제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이 신학교가 폐쇄되면서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 뒤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를 거쳐 성신 대학을 졸업하였고 1948년 12월 18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집안에서는 누님인 강밀라녀(벨크망스) 수녀와 강아라(에스텔) 수녀가 일찍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대전 본당(현 대흥동 본당)의 보좌로 사목 생활을 시작한 강만수 요셉 신부는 1950년 4월 하순 충남 홍성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홍성에 부임한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목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만수 요셉 신부는 계획하고 있었던 성당 신축 문제를 협의하려고 대전 본당의 오기선(요셉) 신부를 방문하였다. 그때가 1950년 7월 중순경이었다.
대전으로 갈 때만 해도 강만수 요셉 신부는 곧 홍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홍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8월 중순까지 대전에 머물다가, 어느 날 대전 공업 학교에 교사로 있던 이항진(토마스) 선생과 함께 공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토마스 선생이 공주에서 공부하였던 덕에 그곳 지리에 밝아 강만수 신부를 공주로 안내하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강만수 요셉 신부는 군에 복무하고 있던 동생 강경수(요한)를 대전 성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동생이 대전 성당으로 기도하러 왔다가 그와 마주친 것이다. 그때 동생 요한이 강만수 신부에게 부산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강만수 신부는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라고 하며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홍성으로 가서 피난을 가지 못한 교우들을 몰래 찾아다니며, 성사도 주고 위로도 해 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공주에 도착한 강만수 요셉 신부와 이항진 토마스 선생은 공주 본당(현 중동 본당)의 성가대장으로 있던 권오현(베드로)을 몰래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권오현 베드로는 그들을 공주 성당 아래 빈집으로 데리고 가서 머물게 하였고, 몇몇 신자들을 찾아가 ‘신부님이 와 계시니 몰래 찾아가서 고해 성사를 보라.’고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목 활동은 얼마 안 되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교우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북한 노동당 정치 보위부원들이 모든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결국 강만수 요셉 신부와 이항진 토마스 선생은 체포되어 사제관 지하실에 수감되는 몸이 되었다.
강만수 요셉 신부의 마지막 성무는 한 신자의 조당을 풀어 주고 혼인성사를 집전한 일이 었다. 수감된 이후 그는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아는 교우들을 대라.’고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 북한 노동당 보위부원들은 수감자들을 트럭에 태워 대전으로 압송하였다. 압송하던 도중, 공주와 대전 사이의 고개에서 많은 사람이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주하였지만, 강만수 요셉 신부와 이항진 토마스 선생은 도주하지 않고 그대로 대전까지 끌려갔다. 그런 다음 북한 노동당이 임시 수용소로 사용하던 목동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들을 대전까지 압송하였던 정치 보위부원은 뒷날 “대전 임시 수용소에서 요셉 신부를 만난 일이 있는데, 신부의 모습이 마치 죽음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라고 증언하였다. 평화로운 표정이 너무나 뚜렷해서 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에 감금된 사람들을 그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강만수 요셉 신부와 이항진 토마스 선생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강만수 요셉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