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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동성당
43. 서봉구 마리노(1926-1950)
서봉구 마리노는 1926년 7월 3일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의 갈마곡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가 되었다. 이때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공소 순방을 하다가 그를 발견하여 본당 영해원(嬰孩院, 곧 보육원)에서 돌보도록 하였고, 그해 3월 4일 마리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서봉구 마리노는 십여 세 때부터 풍수원 인근 농가에서 새경 없이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풍수원 본당 출신인 정원진 루카 신부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신의 본가에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충북 증평 본당에서 서울 영등포 본당(1946년 도림동 본당으로 개칭)으로 전임되면서 서봉구 마리노를 데리고 부임하였다. 그 뒤 정원진 신부는 1945년 11월에 서울교구 경리 담당 신부로 전임되었지만, 서봉구 마리노는 계속해서 도림동 성당에 머물며 복사 겸 성당지기로 생활하였다. 날마다 삼종과 조종(弔鐘)을 치는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서봉구 마리노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자신을 ‘종잡이’라고 놀리면서 불러도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웃음으로 친구들을 대하였고, 윗사람을 존경하였다. 본당에 궂은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도맡았고, 본당 신부의 말은 조금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에서는 서봉구 마리노에게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뿌리치고 성당을 지켰으며, 6월 28일 하우고개 성당(현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으로 잠시 피신하였다가 도림동 성당이 걱정되어 돌아온 이현종 야고보 보좌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들은 공습이 심할 때면 사제관 옆 언덕에 임시로 파 놓은 방공호 안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7월 3일 오후 2시경, 북한군들이 성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이현종 신부의 라디오와 옷과 구두를 빼앗고는 서봉구 마리노를 조사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를 데리고 갔다. 서봉구 마리노는 오후 3시경에 돌아와 성당으로 들어갔고, 뒤이어 북한군 삼십여 명이 다시 성당으로 들이닥쳤다. 바로 그때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북한군 하나가 제의실 앞에서 만난 이현종 야고보 신부를 향하여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이현종 신부가 “이 성당의 신부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현종 신부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
서봉구 마리노는 성당에 있다가 총소리를 듣고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이때 북한군 하나가 “너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 하고 묻자, 서봉구 마리노는 “나는 이 성당의 일꾼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북한군은 서봉구를 향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서봉구 마리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현종 야고보 신부는 그보다 조금 뒤에 사망하였다. 당시 서봉구 마리노의 나이는 24세였다.
며칠 뒤인 7월 9일, 이현종 신부의 작은 고모 이채순 마리아가 조카 신부의 소식이 궁금해서 도림동 성당을 찾았다가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이틀 뒤 두 구의 시신은 이현종 신부 가족들이 그 자리에 임시로 매장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1953년 10월 서봉구 마리노의 시신은 광명리 본당 묘지로, 이현종 야고보 신부의 시신은 용산 성직자 묘지로 각각 이장되었다. 그 뒤 서봉구 마리노의 무덤은 1969년 5월에 도시 개발 계획으로 말미암아 비봉 묘지로 이장된 뒤 확인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