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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중동성당최종수 요한은 1881년 서울 약현 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사목 관할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부터 24년 동안 충청도 공주 본당(현 중동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선종한 최종철(崔宗哲) 마르코 신부의 형이다. 그는 일찍이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이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하였다.
최종수 요한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다음부터 공주 성당 구내에 살면서 본당 일을 도왔고, 묵주와 상본을 제작하여 생계를 꾸렸다. 1945년 11월 최종철 신부가 선종한 뒤에도 그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그는 피신하지 않고 성당을 지켰다.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유하면, 최종수 요한은 “다 떠나면 성당은 누가 지켜.”라고 말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공주 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던 사제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 시잘레(P. J. Chizallet, 池士元 베드로) 신부였다. 시잘레 신부는 전쟁이 발발한 뒤 대전으로 전시 상황을 알아보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고, 본당 수녀들도 익산의 나바위 성당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따라서 최종수 요한 혼자서 성당을 지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1950년 7월 16일에는 북한군이 공주에 진입하였다. 북한군은 성당으로 쳐들어와 인민 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사제관은 정치 보위부로 사용하였다. 또 몇몇은 성당에서 난동을 부렸고, 몇몇은 성모상을 부수려고 총을 겨누었다. 이를 본 최종수 요한이 그들을 막아서면서 “차라리 나를 쏴라.”라고 하자, 북한군 하나가 그를 향하여 총을 발사하였으니, 그날이 7월 20일이었다. 당시 최종수 요한의 나이는 69세였다. 최종수 요한의 시신은 성당 마당에 임시로 매장되었다가 1982년 이후에 공주 본당 묘지(현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