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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상홍리공소
45. 백낙선 요한 사도(1896-1950)
백낙선(白樂善) 요한 사도는 1896년 7월 28일 충남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의 가재 마을에서 백민수와 안동 김씨의 아들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다. 본관은 수원이다.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일찍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열두 살 무렵에 이미 중요한 기도문과 교리 내용을 모두 익힐 정도가 되었다. 1946년에 사제품을 받고 사목을 하다가 1950년의 한국 전쟁 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백남창 아가피토 신부는 그의 아들이다.
1911년에 이 데레사와 혼인한 백낙선 요한 사도는 스무 살 때인 1916년 수원 농림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퇴하였다. 그 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강습소를 설치하고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교양 그리고 천주교 교리 등을 가르쳤다. 또 1920년 3월에 서산 금학리(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성당이 상홍리로 이전되고, 1937년 10월에 다시 서산읍(현 서산시 동문동)으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봉사를 많이 하였다. 상홍리 본당 시절에는 봄가을 판공 때마다 본당 신부의 복사로 공소를 순방하였고, 순교자 현양 운동에서 모범을 보였으며, 1935년부터 본당 회장을 맡아 봉사하였다.
백낙선 요한 사도 회장이 54세 되던 1950년 6월 25일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7월 16일에는 북한군이 서산을 점령하였다. 서산 본당의 주임 장 콜랭(Jean Colin, 고일랑 요한) 신부와 수녀들도 7월 18일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때 백낙선 요한 사도 회장은 합덕으로 피신해 있다가 본당 신부가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7월 19일에 서산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성당에 모셔 둔 성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수습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성체가 걱정되는구나. 놈들이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잡아가며 어디 성체 거두실 틈을 드렸겠냐? 성체가 아직 무사하시다면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거둬야겠구나. 성체가 훼손된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가 독성죄를 범하는 게다.”
백낙선 요한 사도 회장이 서산으로 돌아온 다음 날, 본당의 장 콜랭 신부와 수녀들도 일단 석방되어 성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원들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8월 4일에는 백낙선 요한 사도 회장은 북한군에 체포되어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14일에 가석방된 뒤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뒤에도 그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탓에 북한 노동당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기를 반복하였다. 그 와중에 장 콜랭 신부는 8월 16일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대전으로 압송되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9월 12일 아침에 백낙선 요한 사도 회장을 다시 체포하여 내무서에 감금하였다. 그런 다음 그날 밤에 음암면의 일곱 거리(현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당시 백낙선 요한 사도의 나이는 54세였다.
뒷날 백낙선 회장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는 입고 간 양복은 사라지고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려고 하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둔기로 입을 때렸다고 한다. 평소에 그는 동생에게 “한국이 회복된 뒤에라도 피의 보복은 없어야 할 것이고, 자신이 잡혀가면 죽기 전에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권고하겠다.”라고 말하곤 하였는데, 이마저도 말하지 못하고 피살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