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윤복수 라이문도(1897-1950)
윤복수(尹福洙) 라이문도는 1897년 9월 9일 경기도 개성에서 윤진원과 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윤창규 이냐시오의 집에서 작은어머니 골롬바의 젖을 먹고 성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한 살 위의 사촌 형인 윤갑수 시몬과는 쌍둥이처럼 함께 성장하였고, 1950년 6⋅25 전쟁 때 함께 순교하였다. 인보 성체 수도회 설립자인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는 라이문도의 사촌 동생이다.
윤씨 집안은 윤복수 라이문도가 여섯 살이 될 무렵에 남면으로 이주하여 충남 당진의 유서 깊은 교우촌인 원머리(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 정착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족은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1906년 9월 28일에 함께 합덕 본당(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윤복수 라이문도도 이때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932년에는 합덕 본당 청년회의 사교부장으로, 그리고 그 뒤로는 청년회 회장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은 합덕 본당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7월 12일 당진에 진입하였고, 이튿날에는 합덕 성당으로 몰려와 필립 페랭(P. Perrin, 白文弼 필립보) 신부의 물품을 압수해 갔다. 그 뒤 북한 노동당의 지배 아래서 불안감은 지속되었고, 마침내 8월 14일에 북한군 장교와 내무서원들이 성당으로 몰려와 페랭 신부를 체포하였다.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은 이때 자신의 과수원을 돌보고 있다가 필립 페랭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페랭 신부를 태운 트럭이 성당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를 본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은 다짜고짜 트럭 앞을 막아섰다. 북한군이 “당신은 누구냐?” 하고 소리치자, “나는 성당의 대표자다.”라고 응대하였다. 곧이어 달려온 송상원 요한 복사도 “나는 신부님을 모시는 복사다.”라고 소리쳐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함께 체포되어 당진 내무서로 끌려갔다.
그 뒤 페랭 신부는 대전 형무소로 압송되었고,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는 당진 내무서에서 함께 수감 생활을 하였다. 합덕 본당에서 관할하는 매산 공소(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의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과 원머리 공소(현 신평면 한정리)의 박원근 바르나바 회장도 북한군들에게 체포되어 그곳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수감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를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당진 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대부분을 9월 28일 밤부터 29일 새벽까지 당진 읍내리의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처형하였다. 이때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 박영옥 안드레아 부회장도 총을 맞고 순교하였다. 당시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의 나이는 5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