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0 데지레 폴리

10. 데지레 폴리 신부(1884-1950)

 

데지레 폴리(Désiré Polly, 沈應榮 데시데라토) 신부는 1884년 10월 27일 프랑스 비비에(Viviers)교구 베르노스크(Vernosc)에서 조제프 펠릭스 폴리(Joseph-Félix Polly)와 마리 빅토린 포제(Marie-Victorine Fauget)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때인 1901년 9월 11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06년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 신학교로 건너가 학업을 마친 뒤 1907년 5월 28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907년 한국에 입국한 데지레 폴리 신부는 인천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의 임시 주임을 거쳐 1908년 충청도 결성 본당(일명 수곡 본당, 현 홍성군 구항면 공리)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2년에 본당⋅공소 회장들을 대상으로 회장 피정을 실시하는 등 열심히 사목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로 돌아가 참전해야만 하였다.

1919년 9월 다시 한국에 입국한 데지레 폴리 신부는 서산 본당(현 서산동문동 본당)의 주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의 교수, 강원도 원주 본당(현 원동 본당)의 주임, 대전 본당(현 목동 본당)의 주임, 수원 본당(현 북수동 본당)의 주임을 거쳐 1948년 7월 충남 천안 본당(현 오룡동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수원 본당에서는 성당을 신축 봉헌하였고, 부인 명도회, 돈보스코회 등 평신도 단체의 활동을 장려하였으며, 문맹 퇴치와 어린이들을 위한 한글과 교리 교육을 목적으로 소화 강습회를 설립하였다.

선교 정신이 투철하였던 데지레 폴리 신부는 특히 지역 사회의 복음 전파에 역점을 두고 노력하여 신자 수가 급증하였다. 본당에 부임할 때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선교 사명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였다고 한다.

 

“제가 프랑스에서 이 낯선 한국으로 온 것은 한국 사람들의 불쌍한 영혼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 그런데 저는 민족이 다르고 한국말도 잘 못하므로 직접 주민들에게 전교한다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저를 도와서, 저를 대신해서 주민들에게 전교하여 주십시오.”

 

데지레 폴리 신부가 천안 본당에서 사목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당을 지키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자들이 데지레 폴리 신부를 찾아가 피신을 권유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고 한다.

 

“자기 나라를 두고 피난을 가? 그건 역적이야. 그런데 더군다나 신부가 신자를 놔두고 도망을 가? 그건 신부도 아니야.”

 

천안 함락이 임박하자 미군들이 와서 피난을 권고하였지만, 데지레 폴리 신부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끝까지 성당을 지켰다. 게다가 북한군들이 성당에 들이닥치자 그들을 향하여 “천주교를 믿으라.”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결국 데지레 폴리 신부는 1950년 8월 23일 천안 성당에서 체포되어 북한 노동당원들이 임시 수용소로 사용하던 대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으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예산 본당의 로베르 리샤르(R. Richard, 이 로베르토) 신부를 비롯하여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과 충주 법원 검사(또는 어떤 판사)의 부인과 같이 수감되었는데, 그들에게 “순교를 준비할 때다.”라고 말하면서 마음을 다졌다고 한다.

그 뒤 유엔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수도원에 감금된 사람들을 그 뒤편 언덕으로 끌고 가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데지레 폴리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

 

 

* 사진 출처: 파리외방전교회 홈페이지(https://irfa.paris/missionnaire/2934-polly-des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