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1 필립 페랭

11. 필립 페랭 신부(1885-1950)

 

필립 페랭(Philippe Perrin, 白文弼 필립보) 신부는 1885년 6월 17일 프랑스 오탱(Autun)교구의 리니쉬르아루(Rigny-sur-Arroux)에서 피에르 페랭(Pierre Perrin)과 바틸드 미쉘(Bathilde Michel)의 2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9월 14일 오탱교구 신학생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한 그는 1910년 9월 24일 사제품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이듬해 1월 14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1911년 6월 경기도 능말 본당(현 용문 본당)의 주임으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12년 4월 경기도 하우현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919년 9월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 뒤 중국 간도의 삼원봉 본당(현 용정시 영암동) 주임을 거쳐 1921년 5월 충청도 합덕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그는 30년가량 이곳에서 사목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청빈하게 생활하였고, 지역 사회의 복음화 사업, 신자들의 교리 교육과 신심 함양, 성소 계발에 힘썼다. 일찍부터 성영회(聖嬰會) 사업을 통하여 고아들을 돌봐 주었고, 1947년에는 고아원인 소화 보육원을 설립하였다. 또 의무병 시절에 배운 방법으로 약품을 제조하여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손수 치료해 주었고, 가정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교무금을 내도록 하였다. 1929년에는 새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필립 페랭 신부는 박노열(바오로) 보좌 신부를 피신시킨 뒤 신자들의 피신 권유에도 이를 뿌리치고 성당을 지켰다. 7월 13일 합덕에 진입한 북한군들은 며칠 뒤 성당에 와서 미사를 드리지 말라고 지시한 뒤 돌아갔다. 그렇지만 필립 페랭 신부는 감시가 소홀한 새벽을 택하여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으로 들이닥친 북한군들은 수녀들을 찾아내라며 행패를 부렸고, 십자가를 겨누어 총을 쏘려고 하였다. 그러자 필립 페랭 신부는 “거기에 쏘려면 나에게 쏘라.” 하고 외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보호할 수 있었다.

7월 말 무렵, 신자들이 다시 필립 페랭 신부를 찾아가 피신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필립 페랭 신부는 이를 뿌리치면서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전쟁 후의 교회를 위해서 보좌 신부님은 피난을 보냈지만 나는 안 가지. 북한 노동당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지. 나는 천안의 심 신부(즉 Désiré Polly 신부), 당진의 공 신부(즉 Marius Cordesse 신부) 등 신부님들과 모두 순교하기로 결정했어. 끝까지 남아 교우들과 함께 있다가 순교할 것이야. 고국을 떠날 때 부모님들과 천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렇게 순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왜 가나? 천주께 감사해야지.”

 

8월 14일, 필립 페랭 신부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하루 앞두고 신자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북한군 장교와 내무서원들이 성당으로 들이닥쳤다. 고해소에서 나와 이들을 본 페랭 신부는 이렇게 일갈하였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버릇없이 마구 들어와. 너희들은 방에 들어갈 때 신을 신고 무례하게 들어가니? 여긴 성체를 모셔 둔 거룩한 곳이다.” 그러나 북한 노동당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체포하여 당진 내무서로 연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본당의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도 함께 체포되었다.

북한 노동당원들은 그 세 명을 일단 당진으로 압송하였다가 8월 22일 또는 24일, 필립 페랭 신부와 당진 본당의 마리우스 코르데스(공 마리오) 신부를 대전 형무소로 이송하였다. 필립 페랭 신부는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도 늘 기쁨 가운데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또 음식이 나오면 조금만 들고 다른 수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 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퇴각을 준비하면서 9월 23-26일(또는 9월 25-26일) 사이에 대전 형무소에 감금된 사람들을 형무소 안팎과 우물 등지에서 모두 처형하였다. 이때 필립 페랭 신부도 처형되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나이는 65세였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본문 출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약전
  (2022. 0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