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안동] 하느님의 종 8위 현장 조사(문경, 한실, 상주 등)

[안동교구 현장조사(2019. 4.30~5.1]


문경 여우목 성지



▲ 여우목 성지

- 하느님의 종 김조이 수산나(1818~1867):

충청도 공주에 살던 김 안드레아의 딸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다.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생각을 하였으나 주변 상황 때문에 나이가 들어 박 야고보 혼인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기도와 묵상 생활에 충실하며 자선을 실천하며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문경 호황리(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증평리의 여우목)에 살다가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로 압송된 뒤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굳게 신앙을 증언했다.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고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항구함을 잃지 않았고 자녀들에게 편지를 써서 끝까지 신앙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김조이 수산나는 1867년 1월 20일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는데, 당시 관례로 보아 상주 옥에서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 여우목 성지에서(2019.4.30)


여우목 교우촌




▲ 여우목 교우촌(여우목 큰 마을)


▲ 여우목 교우촌(여우목 큰 마을)


한실 성지




▲ 하느님의 종 박 루치아와 서유형 바오로의 묘소

- 하느님의 종 서유형 바오로(?~1867)와 박 루치아(?~1867):

서유형 바오로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점촌의 모전(현 경북 문경시 모전동)에 살고 있었다. 모전 마을에 포교들이 들이닥친 것은 1868년 음력 10월경으로, 아내 성재추 막달레나와 어린 자녀들, 이웃해 사는 형수 박 루치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상주 진영으로 압송된 뒤 아내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풀려났고 서유형 바오로는 형수 박 루치아와 함께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거했다. 문경 한실에서 체포되어 온 친척 서태순 베드로와 김 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1867년 1월 23~24일에 상주 옥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두 하느님의 종의 무덤은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에 있었으나 2009년 9월 문경 한실로 이장되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험준한 산자락 아래 위치한 한실 교우촌은 하느님의 종 김 아우구스티노와 서태순 베드로를 포함하여 병인박해 당시 많은 교우들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 체포된 곳이다.


"한실은 소백산이라 불리는 긴 산맥의 허리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 열다섯 채 가량의 초가집들이 다섯 개의 작은 무리를 지어 따로 떨어져 있고, 이 작은 무리도 각각 세 채의 오두막집들로 되어 있는데, 소백산맥의 지류 가운데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산맥의 봉우리들은 호리호리하면서도 더러는 바위투성이고, 또 더러는 소나무들로 덮여 있는데, 나무꾼의 도끼질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처럼 빼곡했다. 산맥의 낮은 지대에는 곡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위압적이면서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 지역의 투박한 주민들이 지나다니는 하나 뿐인 외길은 산 정상까지 구불구불한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칼레 신부님의 전기에 실려 있는 '한실' 교우촌에 대한 묘사)




▲ 한실 교우촌 터에서

- 하느님의 종 김 아우구스티노(1805~1867):

청주 갈매골에 살던 양반으로, 젊은 시절 천주 교리를 배웠다. 형이 천주교 입교를 반대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이주했다. 그의 가족들은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그는 한실 교우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보살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6년 11월 아들과 종손자 등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고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1867년 1월 23~24일 함께 투옥되어 있던 서태순 베드로,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등과 함께 62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하느님의 종 서태순 베드로(1823~1867):
충청도 청풍에서 서치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 속에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서익순 요한은 그의 형이다.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살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1859년과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진영에서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고, 6달의 옥고를 치르면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여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냉담한 상태로 지냈으나 과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회두하여 이 때부터 순교의 원의를 다졌다.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뒤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생활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문경 관아로 압송되고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번에는 끝까지 항구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함께 투옥된 하느님의 종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등과 함께 1867월 1월 23~24일에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상주 진영 옥터




▲ 상주 진영 옥터 성지와 성당 내부

*  하느님의 종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서태순 베드로는 상주 진영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하느님의 종 김조이 수산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이곳에서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양 머루산 교우촌 터



▲ 영양 머루산 교우촌은 하느님의 종 김흥금과 김장복 부자가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된 곳이다

-  하느님의 종 김흥금(1765~1815)과 김장복(1797~1815):
 '명숙'이라고도 불린 김흥금은 1765년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장복과 장단 남매를 홀로 키웠다. 교우들이 사는 연풍으로 이주해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경상도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 관아를 거쳐 대구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모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아들 김장복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에서 12월 26일 사이 옥사하였다.



청송 노래산 교우촌 터




▲ 칭송 노래산은 하느님의 종 안치룡이 신앙 생활을 하다 체포된 곳이다

- 하느님의 종 안치룡(1766?~1816?):
충청도 보은 출신으로 교우들 사이에서는 '안 첨지'로 불렸다.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1815년 을해박해 때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구성열 바르바라, 고성대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 관아로 압송되었고, 모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고 그 뒤 다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을 증거하다

1816년경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