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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병영 (원시보, 배관겸)

 

청주 병영

원시보 야고보와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장사한 청주 병영.

당시 청주 병영 내 병마절도사

이미 덕산에서 문초와 형벌을 달게 받은 68세의 원시보 야고보는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심하게 두들겨 맞았고, 두 다리는 형벌로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병영이 있는 청주로 이송되어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중앙공원 내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당진 고을에 있는 진목 마을 출신이었다.
여러 달 동안 그는 자주 고문을 받았으며, 마침내 다른 신앙 증거자들과 함께 청주에 있는 병사 주재지로 이송되었다.
그의 살점은 너덜너덜하게 떨어졌고, 뼈가 온 몸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그는 용기와 항구심으로 시련을 감당하였으며, 20여 일 후에 1799년, 감옥 안에서 매질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다블뤼 주교,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중에서-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비방고지의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천주교를 접하게 되면서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는 덕산에서 문초를 받고, 해미에서 곤장 90대를 맞은 다음 청주로 보내졌다.
음력 12월, 혹독하게 추운 날씨에 그가 가야했던 180리 길.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목에는 칼이 씌워진 상태였다.
그의 백발은 어깨 위로 헝클어지고 상처의 피는 옷에 스며들었으며,
옷은 살갖에 들러 붙어 걷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사흘 만에 청주에 도착하여 다시 신문을 받고 '천주교인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