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배티 성지

배티 성지

 

박해 시대 교우촌,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양업 신부 성당터

 

 

                                                                                             복원된 최양업 신부 성당겸 사제관 내부         

                         

배티는 우리말로 '배나무 고개'를 의미한다. 옛날부터 돌배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티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해지는데, 조선 시대 반역을 꿈꾸던 신천영의 무리가 이곳 일대에 주둔하였다가 병사를 지낸 이순곤의 의병들에게 패하였다는 데서 '패티'라 부르던 것이 점차 '배티'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충청도와 경기도의 접경 지역에 있는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박해시대 이래로 오랫동안 신앙의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왔다.  배티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줄기는 박해시대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도 공소 순방길로 이용되어 왔다.

지형적으로 깊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사방으로 통할 수 있었던 까닭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배티 골짜기로 모여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더욱이 배티와 삼박골 교우촌은 열심한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신앙을 잘 지킬 수 있었고, 박해시대 사목 중심지로서 매우 적합하였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티에 사제관과 소성당을 마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은 뒤, 전국 다섯 개 도(道)를 순방했다. 여름에는 휴식 겸 배티 성당과 사제관에 머물며 한글 기도서와 교리서를 편찬하고 천주가사를 지어 널리 배포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비밀 교우촌이 여럿 있었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해도 소설 <은화>의 주 무대가 된 '삼박골 교우촌'을 비롯하여 15개곳이나 된다. 이곳에서 성 모방 신부가 1836년과 1837년 두 차례에 걸쳐 교우들에게 성사의 은총을 베풀었으며, 1850년에는 '조선교구 소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된 성 다블뤼 신부(1857년 주교 서품)가 배티에 신학교 건물을 마련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고, 1853년 여름부터 신학교 지도를 맡게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54년 3월, 이곳에서 학생 세 명을 뽑아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유학을 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았다. 폐교된 신학교는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되었다.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최양업 신부가 배티 인근에 교우촌 동굴에서 쓴 1854년의 서한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장수(Jansou) 신부의 도착과 사망에 대한 소식을 서두에 적었다. 또한 최양업 신부가 배티로 불러 교육을 시킨 세 명의 신학생을 1854년 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이후,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학습 지도에 대한 당부 사항 등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글로 끝을 맺었다.

 

"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언젠가는 천국에서 만나뵙게 될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적어도 하느님 아버지를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도록, 저와 가련한 조선 신자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

 

 

배티성지 순교 현양비

 

2014년 8월, 배티 출신의 순교자 장 토마스와 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 이 안나 가족이 복자 반열에 올랐다.

복자 장 토마스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6촌 형제로 진천 배티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청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그곳에서 형벌을 받고 다시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어 장대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또한 복자 송 베네딕토와 그의 아들 송 베드로, 송 베드로의 며느리 복자 이 안나는 1866년 병인박해로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가족 5명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1867년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3대에 이른 가족 모두가 병인박해의 칼날 아래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 전경

 

박해가 끝난 이후, 새로 입국한 선교사 두세(Doucet) 신부가 충청도 지역을 순방하였다. 그는 1881년 이래 충청도를 순회하였으며,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이후 1888년에는 백곡 지역을 방문하여 '배티 공소'를 설정하였다. 배티 공소가 설정된 이후 신자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병인박해가 지나간 뒤 배티에 들어온 신자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지었고, 숯장수와 소금 장수로 살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오면서도 심산궁곡을 찾아 교우촌을 형성하며 신앙을 지켰던 신앙 선조들의 발길이 머물러 있는 배티와 그 인근의 교우촌은 성소의 못자리 역할을 하여 이후 많은 성소자를 배출하였다.

* 자료 참조: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양업관으로 향하는 솔밭 사이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과 최양업 신부 동상

 

배티 성지 성모 동산과 야외 제대

 

최양업 신부 성당터로 오르는 103위 성인 계단과 최양업 신부 성당터 옆 십자가의 길

 

겨울 배티 성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 성지순례 및 미사 등의 안내는 배티성지 홈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