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옥터
복자 유중철 요한, 유문석 요한, 이봉금 아타스타시아가 교수당한 곳
복자 이경언 바오로,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사한 곳
은총으로 도움을 받은
우리의 어린 천주 교우는 그 모두를 초월했고, 끝까지 용기와 인내심이 있었다.
그녀는 감옥에서 교살당했는데,
순교와 동정이라는 이중의 화관으로 장식하고, 그녀의 순결한 배우자를 향하여 날아갔다.
- 성 다블뤼 주교 -
- 전주 옥터 -
전주 옥
* 조선 후기 전주에는 옥이 두 곳이었다. 하나는 현재의 중앙초등학교 자리와 또 하나는 과거 전주도청 제2청사였고 이전에는 도립병원이었다가 다시 전북대학병원이 영안실이 있던 곳이다(현 주차장). 이곳은 1840년에 제작된 지도에 의하면 전주 성 동문을 거쳐 동쪽 성벽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있다.
* 전주 옥은 한국 천주교회 박해 기간 동안 전라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고백하였고, 굶주림과 형벌로 인한 고통으로 옥에서 숨져갔으며, 이곳에서 끌어내어져 처형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신앙의 증거지이다.
전주 감옥과 순교 복자
*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이곳에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로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한밤중에 옥졸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순교자가 있다. 또한 이순이 루갈다의 동생인 이경언 바오로와 이봉금의 어머니인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홍낙민 루카의 손자 며느리인 심조이 바르바라는 굶주림과 모진 형벌로 인한 고통으로 병들어 옥사하였다.
- 유중철과 유문석의 순교에 대하여 수록된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801년 10월 9일에 유(중철) 요한과 그의 형제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참수 혹은 교살되었다. ......"
누이여,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 일찍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여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된 유항검 집안에서 맏아들 유중철 요한은 자연스럽게 깊은 신앙심을 쌓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6세가 되던 1795년에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영성체를 하면서 동정생활에 대한 결심을 신부님과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두 해가 지나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 또한 같은 갈망을 지니고 있던 터라 둘은 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렇게 동정 부부가 탄생하였다.
* 유중철은 1801년 신유박해로 전주 옥에 갇혀 있던 8개월 동안 한여음 더위 때조차 단 한 차례도 의복을 갈아입을 수 없었고, 이 기간 내내 목에 칼이 체워져 있었으며, 그 목의 칼은 죽을 때에 비로소 그에게서 제거되었다.
그의 시신을 거두었을 때, 사람들는 그의 의복 안에서 이순이 루갈다에게 보내는 짧은 서신을 발견하였다.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달래시오.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내 운명은 결정되었소."
전주 옥에서 형 유중철 요한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 유문석 요한
* 1801년 초남이에서 부친 유항검이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을 때, 유문석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 유중철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9월 중순 무렵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가 그해 11월 14일 형과 함께 옥에서 끌려나와 교수형을 받았다.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교 순교자 약전>에 담긴 이봉금의 순교 기록 -
'신심이 깜찍한 작은 천사'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의 신앙 고백
*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골 살 때부터는 천주님을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됴.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어머니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압송되었다. 옥중에서 어머니가 형벌로 인하여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포졸과 옥리들의 회유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다졌다.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다. 아직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 성 다블뤼 주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깜찍한 작은 천사였다." , "그녀는 감옥에서 교살당했는데, 순교와 동정이라는 이중의 화관으로 장식하고, 그녀의 순결한 배우자를 향하여 날아갔다. "
- 성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 적힌 이경언 바오로의 편지 -
이경언 바오로가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서한 일부
* 어머니께, ...... 갑자기 생각하지도 않은 아주 특별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께서 이 죄많고 악의 많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의 땅으로 부르시니, 저는 부끄럽고 무서워 떨리지만, 그러나 제가 그분의 거룩한 뜻에 순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나머지 모든 것은 제 마음에 별다른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저를 무서움에 떨게 하는 것은, 허송세월로 보냈던 지난 30년하고도 몇 해입니다. ...... 저의 유일한 희망을 하느님과 성모님의 끝없는 자비에 두고 있으니,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저를 저버리실까요?
* 아내에게, .....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내가 배우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나, 천국에 오르게 되거든 당신을 위하여 우리의 천상 아버지께 전구할 것이며, 내가 당신을 마중 나가 당신 손을 이끌어 영원한 복락을 얻도록 인도하겠소.
- 정해년 음력 5월 14일 편지 중에서 -
* 명도회 회원들에게 ......이 세상의 시간이란 것은 진정 한 순간이니, 선종의 은총을 얻도록 모든 힘을 쏟고 모든 방법을 쓰세요. ...... 만일 내가 먼저 하늘에 오르거든, 여러분 중 누구든지 우리의 큰집에 오늘 날 나는 우리가 지상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악기를 들고 여러분을 마중하러 갈 것이니, 우리 함께 우리의 공번된 아버지 앞으로 가서 그분을 찬양하고 찬미합시다.
- 정해년 음렬 5월 25일 편지 중에서 -
- <일성록> 헌종 기해 8월 19일의 심조이에 대한 기록 -
"그녀는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면서 이를 '영혼이 승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80명의 포졸들에 둘러싸여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고 3세된 어린 아들과 같은 날 옥사한 심조이
* 심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지만 신앙심은 매우 깊었고, 열심히 애덕을 실천하였다. 19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시아버지 홍재영 프로타시오가 유배생활을 하던 광주에서 시아버지와 그곳으로 피신해온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다. 전주 영장 앞에 끌려간 그녀는 80명의 포졸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위협적인 고함소리, 거친 명령 등을 함에도 평온함을 잃지 않았다. 쇠사슬을 채우고 큰칼을 씌워졌다. 연일 몽둥이질 등 형벌로 살점이 찢어져 있었고 모욕과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었지만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형벌로 인한 고통에 이질까지 걸려 숨졌다. 어린 아들 홍 베드로는 감옥 안에서 병들어 있었는데 그녀가 숨을 거둔 지 몇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 김조이 아나타시아의 기록 일부 -
어린 딸의 믿음을 염려한 어머니
* 홍재영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딸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갇힌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온 어린 딸에게 어머니는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그러자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 김조이는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50세의 나이로 어린 딸이 바라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