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김진후 비오 (1739-1814)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金震厚)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김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러나 김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김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김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김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김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김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이미 생명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김진후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인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의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