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김연이 율리아나 (?-1801)
김연이(金連伊) 율리아나는 양인 출신의 부인으로서, 한양에 살 때에 한신애 아가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리고 1795년 이후에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에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 율리아나는 이때부터 자주 교리 강습이나 미사에 참여하면서 점차 신심이 깊어 갔다. 또 ‘천주교의 매파(媒婆 : 중매인 노파)라고 불릴 정도로 교리를 전하는 데 열중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이름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복음 전파에 노력하는 동안 김 율리아나는 ‘폐궁’이라고 불리던 양제궁을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그 집에는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 수산나 등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 율리아나는 이들과 사귀면서 자주 그들을 안내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시켰으며, 이러한 일로 한때는 그녀의 딸이 양제궁에서 나인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00년 12월에 박해가 시작되자, 김 율리아나는 여회장 강 골룸바의 부탁을 받고 김계완 시몬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이어 다음해 초, 공식적으로 박해령이 내려진 뒤에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그녀의 집으로 피신해 왔고, 이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실제로 김 율리아나는 얼마 안 있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녀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문초를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조금도 약한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엄한 형벌 가운데서도 “만 번 죽더라도 천주교를 믿어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율리아나는 강완숙 골룸바, 강경복 수산나, 한신애 아가타 등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형조에서 그녀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연이는 천주교를 중매하는 노파로,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양민을 유혹하여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니,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강완숙과 체결하여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고, 양제궁과 통하여 서로 오가면서 교리를 전하였으며, 달아나는 무리들을 집 안에 숨겨줌으로써 천주교의 우두머리인 황사영이 도망하도록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합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