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김계완 시몬 (?-1802)
‘백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계완(金啓完) 시몬은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약방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그는 1791년 최필공 토마스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그 타당한 교리에 이끌려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창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해에 일어난 신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 시몬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하였다. 또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동료들과 함께 주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는 종종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거나 그의 복사가 되어 교회 일을 도왔다.
1800년 12월경 최 토마스가 체포되자, 김 시몬은 김연이 율리아나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듬해 초에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 신자들의 문초 과정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포졸들은 사방으로 그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김 율리아나의 집을 빠져 나와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러던 가운데, 김 시몬의 늙은 아버지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또한 김 시몬도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로 다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윽고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김 시몬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온 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비록 늙으신 아버지가 있지만, 아버지께 대한 효보다는 천주께 대한 효가 더욱 중요하므로 아버지를 돌보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초가 계속될수록 시몬의 신심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관장과 형리들은 ‘더욱 굳게 교리를 실천하기로 다짐하였다.’고 진술하는 그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후 그는 형조로 압송되었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또는 새남터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이었다. 사형 판결을 받기 전에 김계완 시몬은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저는 무식한 백성으로 천주교에 깊이 빠져 여러 해 동안 신봉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형벌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실로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