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복자 약전

No.57 손경윤 제르바시오
손경윤 제르바시오

57. 손경윤 제르바시오 (1760-1802)

 

‘백원’(伯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는, 1760년에 한양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생활하였다. 1790년 최필공 토마스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한 그는, 이듬해의 신해박해 때에 최필공 토마스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석방되자마자 다시 신앙생활을 회복한 손 제르바시오는 아우인 손경욱 프로타시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6년에 다시 형조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손 제르바시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석방되자마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된 후에는 자신의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는 최창현 요한과 최필공 토마스를 비롯하여, 홍익만 안토니오, 김이우 바르나바 등과 함께 공동체 활동을 하였으며, 정광수 바르나바를 도와 신부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주 주 야고보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이후 손 제르바시오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도우려고 아주 큰집을 매입하였다. 그런 다음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는 교우들을 불러 가르치는 장소로 삼아 효과 있게 신앙 공동체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틈틈이 교리서를 베껴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손 제르바시오 회장은 이러한 열심 때문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우와 함께 경기도의 양근, 교하, 양지 등지로 피신해 다니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자기 대신 처자가 포도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관청에 자수하였다.

손 제르바시오 회장은 먼저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9일(음력 1801년 12월 26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손경윤 제르바시오가 한 최후 진술은 이러하였다.

"일찍부터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하루아침에 이를 바꾸기가 어려웠고, 일상의 고질병처럼 되었습니다. …… 저는 천주교 때문에 여러 번 체포된 뒤에도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여 (천주교에) 미혹된 마음을 바꿀 줄 몰랐습니다. 교우들과 체결하여 깊이 교리를 연구하였고, 널리 교리를 전하였습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출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약전
   (2017. 10. 20. 제3판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