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133위 시복 대상자 약전

No.123 유 베드로

123. 유 베드로 (1846~1869)

 

유 베드로는 구교우 집안 출신으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본래 그의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적당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충청도 제천 북면 번자리(현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베드로의 가족들은 강원도 강릉 계골(현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로 이주하였고, 그 후에 다시 평창 조둔(현 평창군 평창읍 조둔리) 또는 도돈(현 평창군 평창읍 도돈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때 베드로는 교우 황 요한과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를 권면하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부모와 3형제의 화목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69년 8월 그믐 새벽에 밀고자 김석여가 베드로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평소에 베드로와 “아저씨”, “조카”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이에 베드로는 반가운 마음으로 아내에게 아침을 차리도록 하고는 김석여를 방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미 딴 뜻을 품고 있던 김석여는 베드로의 아내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베드로의 손에 수갑을 채웠고, 얼마 안 되어 포교 무리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포교들은 오라로 베드로를 묶은 뒤 그에게 “천주교의 글을 외워 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서슴지 않고 교리 문답과 아침⋅저녁 기도, 선종 기도를 바쳤으며, 기도를 마치자마자 포교들은 베드로를 죽산 관아로 압송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베드로는 묵주를 꺼내 목에 걸고 십자고상을 앞에 모시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포교가 백지로 그의 얼굴을 가리려고 하자 도적의 얼굴은 가려야 하겠으나 자신은 죄인이 아니니 가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이후 베드로는 죽산 관아에 도착하였고, 보름 정도가 지난 뒤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그와 이웃해 살던 비신자들이 베드로의 빈집을 바라보니 빛 한 줄기가 그 집을 비추고 있었으며, 이를 본 그 비신자들은 “천주교를 믿다가 잡혀간 유 씨가 오늘 죽어서 승천하는가 보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 굵은색 표시: 약전 출간(2018년) 이후 수정된 내용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출처: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2018.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