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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여주, 단내, 죽산
임희영(任喜永)은 풍천(豊川) 임씨 집안 사람으로 경기도 여주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에서 살았다. 본래 그의 집안은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부모와 형제가 모두 입교하였으나, 그만 혼자 세례를 받지 않았다. 이에 부친이 그를 입교시키기 위해 자주 달래면서 권면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지만, 이럴 때마다 그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하려면 눈도 귀도 어떠한 감각 기능도 없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이후 임희영의 가족들은 양근 출신의 조제동과 그의 아들 조용삼 베드로, 조호삼 형제를 거두어 함께 살았다. 이들이 너무 빈궁하여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자 함께 살자고 부른 것이다.
그러던 중 임희영의 부친은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자, 그를 불러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교리를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부친이 다시 그를 불러 앉히고는 “만일 내가 죽은 후에 네가 제사를 지낸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내 아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이틀 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임희영은 애도하고 상복을 입었지만, 관례적인 제사는 드리지 않았다. 그의 모든 친척과 지인들이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비난의 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1800년 봄에 소상(小祥)이 돌아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당시 여주 관장은 임희영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고는 포졸들을 임희영의 집으로 보내 그와 함께 조제동과 조용삼 베드로 부자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임희영에게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니, 너를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처형할 수밖에는 없다.”고 하였다. 이 말에도 임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관장은 그를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이 갇혀 있는 옥으로 보내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임희영은 다른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한 달에 두세 차례씩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관장은 그에게 “네가 제사를 지내겠다고 약속한다면 석방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형벌을 받곤 하였다.
여주 감옥에 6개월 동안이나 갇혀 있은 뒤, 임희영은 1800년 10월에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신자들이 그에게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한 네가 견디어내는 형벌들은 너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 목숨을 보전하여 석방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하자, 임희영은 비로소 입을 열고 “부친께서 임종 시에 저에게 유언하시기를 ‘만일 네가 제사를 지낸다면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제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신자들의 권면에 따라 기도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주일과 축일들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임희영은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아마도 임희영은 옥중에서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기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임희영은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임희영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천주 교리를 준수하여 신주를 세우지 않았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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