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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여주, 단내, 죽산93. 정덕구 야고보 (1845~1867)
‘덕오’라고도 불리던 정덕구 야고보는 경기도 용인 더우골(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의 德谷) 사람으로 점촌 삼배일(현 현 용인군 이동면 덕성리의 삼배울)에서 살았다. 그의 가족은 모두 천주교 신자로 생각되는데, 언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1월 26일(음력 10월 20일) 광주 포교 세 패가 삼배일로 쳐들어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할 때, 정덕구 야고보도 조모와 삼촌 정여삼 바오로, 아우 마티아, 예비 신자 이화실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교들은 이들을 모두 한 방에 몰아넣고는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은 뒤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재촉하였으나, 모두가 “죽을지언정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밝힐 수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포졸들은 야고보와 삼촌 바오로, 이화실을 심하게 때려 정신을 잃게 하였다.
이어 포졸들은 야고보의 동생 마티아의 쇠사슬을 풀어주고는 술과 고기를 사오라고 하였다. 마티아는 술과 안주를 실컷 마시고 먹은 포교들이 잠에 빠지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쳐 뒷산으로 올라갔다.
한편 야고보는 새벽에 깨어나 삼촌 바오로와 이화실을 흔들어 깨웠으나 일어나지 못하자 혼자서 몰래 빠져나와 동생과 가족들이 숨어 있던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 가족과 함께 용인 국수봉으로 올라가서 움집을 짓고 살다가 보름 만에 포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굴암 절골(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로 피신하였고, 얼마 안 되어 삼촌 정여삼 바오로와 이화실이 광주로 압송되어 순교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후 정덕구 야고보는 1867년 초에 가족들을 데리고 공주 국실 점촌(현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으로 피신하여 비신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1867년 12월 5일(음력 11월 10일)에는 죽산 포교들이 그곳으로 쳐들어와 야고보를 체포하였다. 이때 야고보는 동생과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너무 염려하지 말고 잘 지내다가 이후 내 뒤를 따라오도록 하라. 혹 내가 혈육의 정(情)에 흔들려 순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내가 죽을 때까지는 아무도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죽산 관아로 압송된 야고보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20여 일 만인 1867년 12월 25일경에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