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공주, 천안

대전교구 현장 조사(2019. 7. 15~17.)

 

[공주] 하느님의 종 16위

국실 교우촌(현 충남 세종시 금남면 국곡리)



▲ 국실 교우촌 터 앞에서

* 공주 국실 교우촌과 하느님의 종 김화숙 베드로(1808~1867):
김화숙 베드로는 충청도 결성 머리실(충남 홍성군)의 중인 출신으로 고향에서 천주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공주 국실 옹기점(현 세종시 금남면 국곡리)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했다. 이 국실 옹기점은 각처에서 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된 교우촌으로 김화숙 베드로는 회장 소임을 맡아 교우들을 가르치고 냉담자들을 권면하는데 힘썼다.
1867년 5월 국실 교우촌으로 포교들이 들이닥쳐 교우 20여 명을 체포하였고, 이때 김화숙 베드로도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베드로는 누구에게 천주학을 배웠느냐는 물음에 "오랜 박해 때문에 책은 다 없어졌고, 내 속에 있는 경문으로 천주를 공경하였노라"고 대답했다.
함께 체포된 2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김 베드로는 공주 진영으로 끌려가 영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신앙을 증언했고, 다시 충청 감사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감옥에서 김 베드로와 동료 교우들은 날마다 함께 기도를 바쳤고, 순교하기 전날에도 함께 기도를 바친 뒤 김 베드로는 "나는 내일이면 죽을 것이다. 당신들도 모두 임종 준비를 잘하여 나의 뒤를 따라와 함께 천당 복락을 누리도록 하자."고 권면하였다. 김화숙 베드로는 1867년 5월 12일 동료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충청 감영 옥터



▲ 충청 감영 옥터로 추정되는 공주시 봉황로 122번지

* 충청 감영 옥 터와 공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들:
충청 감영 옥(향옥)은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신앙을 증거한 곳이면서, 하느님의 종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형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 김화숙 베드로와 동료 20여 명, 그리고 고선양과 그의 가족들이 신앙을 증거하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곳이다. 맞은 편에 위치한 교동 성당에는 충청 감영 옥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들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 교동성당 순교현양비

 

 

 

충청 감영 터



▲ 충청 감영 정문(포정사) 옛 그림과 변천 사진

 



▲ 포정사 문루 앞에서

 

 

황새바위성지



▲ 황새바위성지 순교탑


▲ 황새바위성지 순교탑 안내문

 



▲ 황새바위성지 무덤 경당 기념석

* 황새바위성지와 하느님의 종 7위:
황새바위 성지에서는 하느님의 종 7위(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 김화숙 베드로, 고선양)을 비롯하여 공주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기리고 있다.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참수형을 받은 형장의 위치는 지금의 황새바위성지에서 제민천 하류 일대로 추정된다. 1911년에 베네딕토회 아빠스 베버가 남긴 기록과 1801년 노상추(당시 홍주 영장)의 일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공주 향옥에서] 다시 문밖으로 빠져나오는데, (...) 내를 따라 몇 백미터 더 내려가면 좁은 평지에 성긴 숲이 나타난다. 이곳이 형장이다. 순교자들의 피가 도적들의 피와 섞여 마른 모래를 적셨다. 냇물이 넘치면 피에 젖은 모래가 나무 밑까지 쓸려왔다. 목 잘린 시신들이 뒹글었다." (노르베르트 베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사학 죄인 이존창을 [(음력} 2월] 28일 서울에서 압송해 와 금강 사장에서 참수하였으니, 도내의 모든 무리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라는 공문이 도착하였다." (노상추, <일기>, 신유 3월 3일)

 



▲ 황새바위 무덤 경당 내부 기념 석관

 



▲ 황새바위성지 무덤경당 앞에서

 

[천안]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



▲ 성거산순교성지 제1줄무덤 표석

 



▲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

 

* 현재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에는  하느님의 종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의 유해가 함께 모셔져 있다.
1959년 성거산의 미군기지를 위한 도로 공사로 소학골 인근에 있던 하느님의 종들의 원래 묘소들(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을 성거산으로 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순교자들의 무덤을 한꺼번에 이장하면서 유해 구분 표시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1997년 제1, 제2줄무덤을 조성 때 마찬가지의 어려움으로 어느 묘소가 어느 순교자의 묘인지, 또 한 봉분 안에 몇 구의 유해가 있는지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다.
 
-목천 소학골 교우촌과 하느님의 종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의진 요셉, 배문호 베드로: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함께 살며 신앙생활을 하다 1866년 소학골 교우촌에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체포되어 목천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공주로 이송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했다. 1866년 12월 14일 교수형(공주 향옥 추정)으로 함께 순교했다.

 

 



▲ 성거산성지 제1줄무덤 앞에서

 

목천 소학골 교우촌 터(현 성거산성지 내) 
이미 1800년대 초부터 목천 소학골에는 신자들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형성했다. 칼래 신부도 1864년 여름부터 여름 휴식처로 이곳 소학골에 머물며 활동하였는데, 소학골을 두고 "독수리 둥지마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호랑이가 득실거리며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성거산 성지 내에 복원된 소학골 교우촌 촌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