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성지

당고개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

 

 

 

기해박해 순교 성인 9위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 순교지

 

 

- 2011년 9월 새단장을 마친 당고개순교성지 -

 

* 당고개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본래 새남터나 서소문 밖과 같이 형장이 아니었던 당고개는 무악재로부터 아현과 만리재를 지나 지금의 용산구청에 이르는 산줄기가 끝나는 부분으로 만초천과 맞닿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할 장소를 갑자기 서소문밖 형장에서 당고개 형장으로 바꾸었다. 이는 1840년 설날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는 상인들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이로인해 1839년 12월 27~28일(음력), 이곳에서는 모두 10명이 참수형을 받았다. 27일에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권진이 아가타, 이경이 아가타, 손소벽 막달레나, 이인덕 마리아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 등 7명이 순교하였으며, 다음날에는 홍영주 바오로, 최영이 바르바라, 이문우 요한 등 3명이 순교하였다.

 

당고개에서 순교한 홍병주와 홍영주 형제는 1801년 순교한 홍낙민 루카의 손자이며, 이들보다 1개월 전에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조카들이다. 형제나 부자를 함께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조선 법률에 따라 홍병주 베드로는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에 당고개에서 동료들과 함께 4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고, 그의 아우 홍영주 바오로는 다음날 형이 집행되어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복자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한 9명은 1984년 5월 6일에 모두 시성되었다.

 

홍병주, 홍영주 형제가 신앙을 지키며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여 시성의 영예를 얻게 되기까지 앞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그들의 순교 선조들, 홍낙민 루카와 홍재영 프로타시오 순교자 그리고 당고개에서 참수된 이성례 마리아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당고개 순교 성지는 지역 재개발로 2008년 철거되고 3년간의 재개발 공사를 마치고 2011년 9월 4일 봉헌식을 가졌다. 성지는 신계역사공원 내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성전과 전시관, 사무실 등이 있고, 지상1층의 잔디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십자가의 길, 한옥 성물방으로 꾸며졌다. 

 

    

 

 

 

                   

성녀 손소벽 막달레나

그녀는 일곱 번이나 문초당하는 동안 주뢰를 세 번 틀리고 태장 260도를 맞아 살이 헤어져 떨어지고 상처에서는 피가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늘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만일 천주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내 힘만 가지고는 다만 일각이라도 벼룩이나 이가 나를 뜯어먹는 것만이라도 참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주께서는 참아 받을 힘을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 잔디광장의 당고개 순교 성인들의 모자이크 벽화-  

 

 

 

 복자 이성례 마리아와 아들 야고보

 

 

<최우정 바시리오 이력서>

                                                        

 

*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셋째 동생인 최우정 바시리오의 장남 최상종 빈첸시오가 1939년에 기록한 <최우정 바시리오 이력서>는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성례 마리아와 아들 야고보와의 이별 장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당시 14세 된 야고보(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음식을 사서 옥중의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을 알고 있는 관노의 자식들에게 몇 번이나 빼았겼었다. 그후부터 그는 큰 신바닥에 돈을 넣고 신고 다니게 되었다. 하루는 그가 모친을 뵈러 가자 머리를 빗겨 주면서 이르기를, '아무쪼록 어린 동생들을 각별히 보호하고 사랑하도록 하고, 아무 곳, 아무 곳으로 각각 데려다 주도록 하거라. 어떻게든 살아가노라면, 중국 마카오에 가 있는 너희 형이 나와서 그때 다시 안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아무 날은 내가 순교하는 날이다. 그날은 오지 말도록 하여라. 만일 내가 너를 보면, 미진한 육정에 다시 유감이 생길까 염려되니 오지 말도록 하여라' 하면서 어서 나가기를 재촉하였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정황이 이러했으니 모자의 정이 어떠했겠는가? 야고보의 어린 가슴도 한없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야고보는 시름없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집안의 잔돈푼을 모아 가지고, 모친께서 순교하신다는 당일에 옥사장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묻기를, '이번에 형을 집행하는 희광이가 누구냐?'고 하니, '아무개라' 하는지라. 그 희광이를 찾아가서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주며 부탁하기를, '모습이 이러이러한 죄수는 우리 모친이시니, 칼을 갈아 형을 집행하되 각별히 조심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이에 무도한 희광이도 그를 칭찬하며 '염려말라'고 하였다.

 

형을 집행할 시간이 다가오자, 여러 죄수 순교자들을 당고개로 데리고 가 모아 놓고 차례로 형을 집행하여 참수하였다. 그리고는 한 곳에 시체를 모아 구덩이에 넣고 길다란 가래로 묻는 것이었다.

 

어린 야고보가 먼 곳에서 이 정경을 보고는 실성하고 낙담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가 언제 나오시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 <최우정 바시리오 이력서> 중에서

 

 

 

- 잔디광장 야외 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