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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여주, 단내, 죽산
정종호(鄭宗浩)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친절하고 점잖으며 조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 그의 가족 모두가 그의 모범을 따라 열성과 충실함을 다해 천주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종호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천주교에 입교한 뒤 정종호는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1800년 3월(음력)의 부활 대축일 때에는 당시의 풍습대로 개를 잡고 술을 빚어 마르티노와 요한 등 여러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길가에 모여 잔치를 벌이면서 함께 부활 삼종 기도를 바치고 큰소리로 성가를 합창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즉시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정종호와 동료들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6개월 동안이나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고, 1800년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으나, 누구도 신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해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정종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 나갔다.
경기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정종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50세 가량이었다.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정종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수를 받들어 모시며 감히 훼손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정도로 천주 교리에 깊이 빠졌고, 또한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