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하느님의 종 16위
공세리 성당(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 공세리 성당 순교자 현양탑 |
* 공세리 성당과 하느님의 종 박의서 사바, 박원서 마르코, 박익서:
지금의 공세리와 인접한 걸매(현 충남 아신시 인주면 걸매리)는 조선 후기 수원(화성 유수부)에 속해 있었다. 이곳 걸매 출신의 대표적 순교자들이 박씨 삼형제인 박의서 사바(1808~1867), 박원서 마르코(1817~1867), 박익서(1823~1867)이다. 이들 집안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조부 때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내포 지역에 천주 신앙을 전파한 뒤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삼형제는 어릴 때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고 자랐고, 특히 부친으로부터 열심히 교리를 배웠다.
맏형 박의서 사바는 장성한 뒤 걸매 교우촌의 회장이 되어 교우들의 신앙을 이끌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예산 여사울로 박해를 피해 살았으나 이듬해 1867년 수원 포교가 걸매에 다시 들이닥치면서 그곳에 남아 있던 교우들과 여사울에 살던 박씨 삼형제와 가족이 체포되었다. 이때 둘째 박원서 마르코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순교를 다짐했다.
"내가 평소에는 진실되게 천주를 공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번에 끌려가 죽게 된다면 우리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서 살겠소."
맏형 박의서 사바도 용기를 내어 "우리 삼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함께 수원 관아로 끌려갔다. 수원 유수부에서 삼형제 모두 한결같이 신앙을 굳게 증언하며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7년 음력 3월이고, 맏형 박의서 사바의 나이는 59세, 박원서 마르코는 50세, 박익서의 나이는 44세였다.
순교한 뒤 삼형제의 시신은 아산 맹고개(현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안장되었다. 1988년 삼형제의 무덤이 확인 발굴된 뒤 공세리 성당 경내로 옮겨졌고, 다시 2006년 성당 경내 묘를 파묘하여 유해를 수습하였으며, 2007년 세워진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에 함께 모셔져 있다.
▲ 순교자 현양탑 앞에서(2019. 7.16.) |
▲ 공세리 32위 순교자 현양비 |
▲ 하느님의 종 3위 묘 이장 관련 기록(공세리 성당 내 박물관 기록) |
[당진]
원머리성지(신평성당) 순교자 묘역(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
▲ 원머리성지 순교자 묘역 |
* 원머리성지와 하느님의 종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
하느님의 종 박태진 마티아(1819~1868)와 박선진 마르코(1836~1868)는 사촌지간으로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함께 천주 신앙을 배웠고 집안의 반대에도 원머리 교우들과 함께 신앙지켰다. 이미 원머리는 1850년대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1866년부터 박해를 겪고 몇몇 교우들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2년 뒤 1868년 가을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도 원머리에 들이닥친 수원 포교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었고, 이때 박선진 마르코는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며 이렇게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이제 가면 죽을 것이니 어찌 혈육의 정에 박절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명에 따라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데 좋은 일이니, 과히 염려 마시고 몸조심하십시오."
함께 수원 관아에 끌려온 뒤에 박 마티아가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박 마르코가 힘써 권면하여 함께 다시 신앙을 꿋꿋이 증언하고 옥에 갇힌 지 보름만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49세, 마르코의 나이는 32세였다.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같은 마을에 살던 서덕행이 거두어 원머리(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에 나란히 안장하였다.
▲ 하느님의 종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의 묘(후면) |
▲ 원머리 순교자 묘역 1929년 당시 사진 |
▲ 하느님의 종 박선진 마르코(좌)와 박태진 마티아(우)의 묘 |
▲ 원머리성지 순교자 현양비 |
▲ 신평 성당 순교자 기념비 |
▲ 원머리성지 순교자 묘역에서(2019. 7. 16) |
[서산]
* 강당리 교우촌과 하느님의 종 김선양 요셉과 최 마리아:
강당리 교우촌(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은 가야산 일대에 자리한 곳으로, 병인박해에 많은 교우들이 끌려가 순교했고, 이후에도 계속 교우들이 신앙 생활을 계속해온 곳이다.
하느님의 종 김선양 요셉(1808~1866)과 동료 교우 16명은 이 강당리 교우촌에서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11월 9일 함께 체포되어 홍주로 이송되었다. 홍주 진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옥에 갇힌 뒤 며칠 뒤 모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때느 1866년 12월 27일로 김선양 요셉의 나이는 58세였다. 이후 17명 순교자 모두 한 구덩이에 묻혔다고 한다. 한편 요셉이 순교한 뒤 그의 아내 하느님의 종 최 마리아(?~1867)도 아들 대신 체포되어 홍주로 끌려와 신앙을 증언하고 1867년 1월 22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서산 강당리 교우촌 터 앞에서(2019. 7. 16.) |
[당진]
신리성지(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 신리 성지 내 성 다블뤼 주교관 |
* 신리(거더리)와 하느님의 종 손경서 안드레아: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신리와 인접한 마을 거더리에는 나루가 있어서 배로 외부 왕래가 수월했다고 한다. 신리와 거더리를 합쳐 '신리'로 불렸는데,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1784년 세례를 받은 뒤 신리에도 천주교를 전파했다. 이 무렵 신리에 정착해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 하느님의 종 손경서 안드레아(1799~1839): 본관은 밀양, 보명은 '경규'.
충청도 홍주 신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 출생으로, 천주 신앙을 일찍 받아들인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다. 1866년에 순교한 성 손자선 토마스는 손경서 안드레아의 당질이다.
손 안드레아는 부요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성품이 너그럽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사업에 능하였고 친척과 친구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교회 일에 관심을 갖고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 때부터 교회 일을 도왔고,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여러 선교사들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선교사들을 보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수원 고을 '상게'라는 반도(현 아산만 방조제 시작 부분으로 닭 머리를 닮아 '달계모리[닭의 머리]'로 불렸다고 한다)에 주교의 피난처를 마련하여 그곳에 앵베르 주교를 모셨고, 이어 주교의 명에 따라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마저 모셔오려 했으나 밀고자의 밀고로 결국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기에 이른다.
손 안드레아는 잠시 피신했으나 남은 가족이 포교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자 자수하였다.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 속에서 잠시 배교하는 나약함을 보였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배교를 취소하였고 1839년 12월 28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예산]
여사울 성지(충남 예산시 신암면 신종리 105)
▲ 여사울 성지 |
* 여사울 성지와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1759~1801):
'충청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내포 여사울의 부유한 천인 출신이었다.
본관은 경주이고, '단원'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그는 신분과 달리 경제적으로 넉넉하였고, 본디 재주도 많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 일찍이 학문을 닦았다. 17세 때 권철신 문하에 들어갔고, 특히 권일신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우고 영세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4년 말로 고향 여사울로 내려가 인근 지역(내포)에 천주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으로 내포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1786년 1년여 동안 시행된 가성직제도 아래서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여 더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다 1791년 박해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형식적으로 배교하고 석방된 뒤 곧 신앙을 회복하였다. 다시 전교를 시작하고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고, 같은 해 1795년 일어난 을묘박해로 또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또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에 굳게 신앙을 지키며 옥살이를 하면서 교회 지도층과 연락하여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1799년 잠시 마음이 약해져 감옥에서 풀려나 천안으로 이송되어 연금 생활을 하였으나 이때도 변함없이 교리를 실천하고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공주로 이송되어 감영 옥에 투옥되었고,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다시 서울로 이송되어 의금부에서 또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 누구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1801년 4월 10일 해읍정법(고향으로 보내 처형하여 지역민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는 판결)의 명에 따라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이 루도비코 곤자가의 나이 42세였다.
▲ 내포 사도 이존창 생가 터 및 '내포천주교복음첫터' 기념비 |
▲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유적비 |
▲ 내포사도 이존창 생가터 기념비 앞에서(2019. 7.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