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현계흠 플로로 (1763-1801)
‘사수’ 혹은 ‘계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현계흠(玄啓欽) 플로로는 한양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역관을 배출했으나, 그는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약국을 운영하며 살았다. 1846년의 순교자 현석문 가롤로 성인이 그의 아들이며, 1839년의 순교자 현경련 베네딕타 성녀가 그의 딸이다.
현 플로로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된 다음에 석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후로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현 플로로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하였다. 또 손경윤 제르바시오, 김이우 바르나바, 정인혁 타대오 등과 함께 자주 신앙 집회를 가졌고,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주 야고보 신부가 박해로 피신을 해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집은 ‘6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었다. 6회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하부 조직이며 비밀 집회소였다.
현 플로로는 1797년 9월, 아우가 살고 있는 경상도 남쪽의 동래 지방에 간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마침 그 지역에 나타난 영국 배를 보게 되었는데, 상경한 뒤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현 플로로는 기회를 틈타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온 일가 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경에 숨어 있던 곳에서 스스로 나와 포도청에 자수하였다. 이후, 그는 포도청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현 계흠 플로로는 10월 초까지 포도청의 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황사영 알렉시오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상급 재판소인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1801년 12월 10일(음력 11월 5일)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