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의 본은 풍산(豊山)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낙민(洪樂敏, 루카)은 그의 조부이고,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순교한 복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은 그의 부친이며, 모친은 정약현(丁若鉉)의 딸 정조이(丁召史)였다. 또 1839년의 순교 복자 심조이(沈召史, 바르바라)는 토마스의 부인이고, 1840년에 순교한 성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홍영주(榮周, 바오로) 형제는 토마스와 사촌 사이였다.
홍봉주 토마스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친 프로타시오가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할 때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우고 이를 열심히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장성한 뒤 심 바르바라와 혼인한 그는 한때 방탕함에 빠져 본분을 잊고 살았다. 이를 본 부친이 토마스의 머리카락을 잘라 집밖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로 부친 프로타시오와 아내 바르바라가 순교했을 때, 토마스는 배교하고 석방된 뒤 선대의 고향인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의 방탕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토마스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되찾은 것은 1853년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를 만나면서였다. 이후 토마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신임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생활했고, 그 결과 선교사들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1855년에 홍봉주 토마스는 메스트르(J. Maistre, 李 요셉) 신부의 명에 따라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Berneux, 張 시메온) 주교를 입국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그는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베르뇌 주교를 기다리다가 주교 일행을 만나 이듬해 3월에는 함께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토마스는 해적을 만나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훗날 페롱(S. Fé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가 이에 대해 “그처럼 위험한 여행을 또다시 할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묻자, 그는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토마스는 예산 본가로 내려갔다가 1861년에 처자가 모두 사망하자 서울로 이주하여 베르뇌 주교의 복사로 봉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겸손과 인애의 표양을 보였으며, 교회 서적을 출판할 때는 판각 글씨도 많이 썼고, 주교댁을 전동(典洞, 현 서울 종로구 견지동⋅공평동)에서 태평동(太平洞, 현 서울 중구 북창동⋅서소문동)으로 이전하는 일도 주선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모든 일을 주님의 일로 알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1865년 말에 홍봉주 토마스는 방아책(防俄策), 곧 두만강 근처에 자주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방어할 책략을 마련하여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건의하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나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는데, 이때 그의 동료 김면호(金勉浩, 토마스),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남종삼(南鍾三, 요한) 등이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미루다가 병인박해를 일으켰고, 홍봉주 토마스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토마스는 형관들의 추궁에도 끝까지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선교사들의 거처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가 형벌 중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그는 곧바로 이를 뉘우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3월 7일(음력 1월 21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2018.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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