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대구 경상 감영, 비산 성당, 한티

대구대교구 현장 조사(2019. 4. 29)

 


경상 감영 옥터
(현 대구시 중구 서성로 16길 77 서문로교회 인근)


경상 감영 옥에서 옥사한 순교자

김흥금(1765~1815), 김장복(1797~1815)
 '명숙'이라고도 불린 김흥금은 1765년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일찍이 아내와 사별하고 장복과 장단 남매를 홀로 키웠다.
교우들이 사는 연풍으로 이주해 살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경상도 진보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으로 이주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관아를 거쳐 대구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모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아들 김장복과 함께  1815년 11월 18일에서 12월 26일 사이 옥사하였다.

 

안치룡(1766?~1816?)
충청도 보은 출신으로 교우들 사이에서는 '안첨지'로 불렸다.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1815년 을해박해 때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구성열 바르바라, 고성대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 관아로 압송되어
모진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고 그 뒤 다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앙을 증거하다 1816년경 옥사하였다.

 


 경상 감영 옥터 앞에서(2019. 4. 29.)

 


경상 감영 선화당


경상 감영은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 김흥금, 김장복, 안치룡을 비롯하여
병인박해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 등이 용덕을 드러내며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비산 성당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어릴 때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곳으로 추정된다.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1838~1868)
어린 시절 대구 감영의 아전을 지냈던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여동생들과 함께 살다가 16세에 처음 천주 신앙을 접했고 이때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였다.
이후 동정을 지키면서 검소한 가운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한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교회서적을 필사하고 묵상과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기도 했으나 대구 포교에게 체포되어 대구 관아를 거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1868년 30세의 나이로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서태순 베드로의 묘


서태순 베드로(1823~1867)
충청도 청풍에서 서치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 속에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서익순 요한은 그의 형이다.
박해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이주해 살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1859년과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진영에서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고, 6달의 옥고를 치르면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여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냉담한 상태로 지냈으나 과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회두하여 이 때부터 순교의 원의를 다졌다.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뒤 문경 한실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생활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문경 관아로 압송되고 다시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번에는 끝까지 항구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함께 투옥된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등과 함께 1867월 1월 23~24일에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한티교우촌은 이 알로이시오 곤자가가 신앙생활을 했던 신앙 터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