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자료

구산, 천진암, 남한산성, 뫼룬리

수원: 47위

 

 

[구산 성지]

 

 

 

 

 


▲ 구산 성지 경내  순교자 묘역

 

* 구산성지에는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 김성희 암브로시오의 묘가 모셔져 있다. 하느님의 종 김덕심과 김윤심의 묘소(맨 위 사진)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묘와 나란히 앞줄에 자리해 있고,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삼촌 김윤심과 함께 순교한 김성희 암브로시오의 묘(두번째 사진)는 뒷줄 우측에 자리해 있다.

  • 김덕심 아우구스티노(1798~1841):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만집', '덕심'은 자.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1794~1840)의 아우(차남)로, 구산 교우촌에서 태어나 형제들과 신앙생활을 하다 기해박해 때 아우 김윤심 등과 체포되어 남한산성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옥고 끝에 1841년 2월 19일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품은 채' 43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1801~1868):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문집', '윤심'은 자. 김 안토니오 성인의 아우(삼남)로, 구산 교우촌에서 태어나 형들과 신앙생활을 하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남한산성에서 무려 19년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뒤 다시 구산교우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686년 다시 체포되어 광주유수부(남한산성)에 투옥되었고, 조카 김성희 암브로시오와 함께 3월 8일 6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옥중 교수로 추정). 
  • 김성희 암브로시오(1815~1868):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외아들. 자는 '희백'. 부친의 성품을 닮아 어질고 인자했던 그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구산교우촌의 회장 소임을 맡아 전교에 힘썼고, 약국을 경영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등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1868년 숙부 김윤심 등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1868년 3월 8일 53세의 나이로 숙부와 함께 순교했다(옥중 교수 추정).

 



▲ 하느님의 종 김덕심과 김윤심 묘소 앞에서(2019. 3. 21.)

 

 

[천진암 성지]

 



▲ 천진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 암브로시오, 이승훈 베드로 묘소 앞에서 



▲ 2012년에 세운 한국천주교회 창립 233주년 기념비

 

[남한산성]

 

 

 

 



▲ 남한산성 동암문(시구문) 표석, 순교자들의 시신은 시구문을 지나 바로 옆 계곡에 버려졌다

 

 

 



▲ 동암문(시구문) 표지석



▲ 남한산성 포도청 터와 감옥 터(현 로터리 주창장 너머 천일관 옆에 포도청 자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 지점에 9칸의 포도청이 있고, 그 위쪽으로 10미터 떨어진 곳에 21칸의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9위:

김덕심 아우구스티노(옥사),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장사), 이조여 요셉(장사), 정여삼 바오로(옥사 추정), 이 요한(교수), 정은 바오로(백지사), 정 베드로(백지사), 김윤심 베드로 알칸타라(옥중 교수형 추정), 김성희 암브로시오(옥중 교수형 추정).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와 사위 이조여 요셉은 관장에게 신문을 받다가 매 맞아 순교했다.

백지사형도 신문 과정에서 행해졌으므로 하느님의 종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도 관장이 신문하던

장소(좌승당이나 수어영[연무관])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했을 것으로 보인다.

 



▲ 연무관(수어영) 뜰은 군인들의 훈련장이며 형벌터였다. 하느님의 종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와 이조여 요셉이 순교한 곳이다

 

 

 



▲ 남한산성 순교자 현양비

 

[뫼룬리]

 



▲ 성 볼리외 신부 은신 동굴. 이 동굴 인근에 뫼룬리 산골 교우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하느님의 종 서태순 아우구스티노와 이조여 요셉과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서태순 아우구스티노(1829~1966)와 그의 사위 이조여 요셉(1843~1966)은 성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를 모시고 광주 뫼룬리(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살았다. 볼리외 신부는 이 은신 동굴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신부댁의 주인'으로 알려진 두 사람은  뫼룬리 마을 교우들과 함께 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 유수부로 압송되었다. 장인과 사위는 모진 형벌 속에서 굴하지 않고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연무관에서) 매질 아래 1866년 음력 2월 순교하였다. 당시 서태순의 나이는 37세, 사위 이조여의 나이는 23세였다.